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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틸 라이프 Feb 16. 2019

켄트 하루프-축복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정답


컬트의 제왕 데이비드 린치 영화 <블루 벨벳>의 시작은 이렇다. 주로 백인 중산층이 거주하는 미국 소도시의 오전 한때. 소란이 사라진 다운타운 거리와 붉은 꽃이 만발한 정원을 다듬는 주민의 분주한 움직임. 그러나 원경으로 잡은 마을의 평화는 카메라가 정원 풀숲으로 파고들어 토막 난 손가락에 몰려든 바글바글한 개미 떼를 클로즈업하며 산산이 부서진다. 멀리서 바라보던 아름다운 마을 풍경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양한 상처로 일그러진다.
주인공 대드가 살아온 한적한 마을 홀트는 린치 영화에 등장하는 말끔한 배경과 닮은꼴이다. 시간은 이곳에 이르러 더디게 흘러가고 거리는 정물화처럼 박제되어 오랫동안 제자리다. 다정한 공동체인 주민들 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실과 이별의 후유증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인물들은 서서히 순행하는 인생의 시간을 걷다가 예견하지 못한 폭력과 만나고 느닷없는 운명에 멈칫한다. 이들 중 홀트의 기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려 마을과 사람을 지울 수 있는 피난처 덴버로 경로를 이탈한다.

소설의 기둥을 이루는 인물은 죽음을 목전에 둔 암환자 대드 루이스와 신념을 굽히지 않아 주위와 반목하는 목사 라일이다. 이들은 생의 전환기에 마을과 거리 두기를 통해 내면의 고통을 응시하고 생의 환희 앞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인물이다. 철물점 주인 대드 루이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신의 집 포치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는 평생을 일한 홀트의 거리에서 평범한 일과를 보내는 상점 안 사람들을 바라보며 매일 겪는 하찮은 일상이 삶의 축복임을 깨닫는다. 성경의 자의적 해석으로 신도에게 외면당하고 가족과 충돌하던 목사 라일은 밤의 산책을 통해 이웃을 엿보다 주민에게 신고당한다. 물끄러미 타인을 훔쳐보는 그의 행위를 단속하는 경찰에게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남모르게 탄식한다.
성경 구절을 이용해 걸프전에 참전한 미국의 야만성을 경고하던 라일은 주민에게 뺨을 맞고 대드는 가게 돈에 손을 댄 직원 부인의 제안에 응하지 않아 뺨을 맞는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상대의 갑작스러운 폭력은 동성애자인 대드의 아들 프랭크와 이제 사랑에 눈을 뜬 라일의 아들 존 웨슬리에게도 반복돤다. 둘은 현재 시점에 끝내 아들과 불화한 채 세상을 뜨거나 이별하여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게 되는 인물이다. 인간의 행로를 결정하나 보이지 않는 운명은 끝내 의지와 기대를 배반하고 후회의 뒷모습만 보이고 달아나버린다.

한 달여 시간을 선물 받은 대드는 일생을 보낸 집에 돌아와 차분하게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가족과 함께 남은 시간을 추억하며 하루하루를 마감하는 대드는 누구보다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마 여러 번 이 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약속된 인생의 순서대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가족과 이웃과 인생과 이별하며 큰 고통 없이 무의식의 세계에 안착한다. 자연이 흔히 그러듯 생명이 꺼지는 곳에선 일상처럼 어린 소녀의 생명력이 마을을 채우고 이웃의 온기는 외로운 아이의 보호막이 되어 한 영혼이 떠난 자리를 빈틈없이 공기와 햇빛처럼 채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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