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게임의 여왕
운명의 비극을 다룬 그리스 신화적 세계로 인간을 극단적으로 몰아넣고 윤리를 실험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가 그려낸 역사극은 어떨까. 호기심이 앞섰다. 결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보기의 즐거움과 흥분의 롤러코스터를 만끽.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재미있다.
에비게일(엠마 스톤)이 처음 등장하는 아주 짧은 컷.
런던으로 향하는 마차 안 찰나의 쇼트는 광각 렌즈를 사용, 비좁고 빼곡한 마차 속 누추한 사람들과 좁은 공간을 강조한다. 이 씬은 그녀의 비천한 신분과 남루한 행색을 노출하고 마주 앉은 남자와 주고받는 노골적 눈빛으로 에비게일이 과거 도덕성 따윈 사치였을 거란 정보를 단숨에 제시한다.
영화는 백성의 목숨은 안중에 없는 권력을 향한 귀족들의 탐욕과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인물로 돌진하는 트래킹 샷과 극단적 로우 앵글을 통해 풍자하고 희화화한다. 화려한 연회를 열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귀족은 역할놀이를 즐기는 광대와 흡사하며 그들이 사랑하는 애완 토끼와 거위들과 다를 바 없다. 어안렌즈로 촬영해 만화경처럼 보이는 귀족 모습은 타락한 인물을 기괴하게 묘사한 중세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세상처럼 그려진다. 인물들은 영화의 예언대로 결국 제 눈을 찔러 스스로 몰락하고 더러운 똥과 뒤섞인 길거리 진흙 속에 내동댕이 쳐진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날카로운 음향에 가까운 불협화음은 이들의 불길한 운명을 암시하고 관객을 불쾌한 긴장 상태에 빠지게 한다.
시대극의 재미는 엄격한 신분 질서에 갇힌 인물이 자유를 억압받는 가운데 영리한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에 있다.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두 인물의 대결은 시위를 당긴 활처럼 팽팽하다 결국은 진실과 거짓의 대결인 것처럼 마무리된다. 엔딩에 이르서야 상처로 무력해 보였던 시종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여왕의 진가가 드러나는데 그때 그녀의 결정이 개운치 않다. 여왕과 에비게일의 마지막 표정은 권태와 진저리와 그 외 불쾌한 감정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배회한다. 이 순간 여왕의 얼굴은 절대권력을 부여받은 자가 홀로 견뎌 온 시간과 피곤이 농축되어있다. 냉혹하고 유아적인 군주의 놀음에 농락당하는 여인들의 암투를 뒤로 하고 여왕은 중얼거린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아랫것들이란 하여튼. 영화는 세 여인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오는 연기의 쾌감이 굉장하다.
셰익스피어 희곡과 소네트처럼 장을 나누고 자막을 사용하는 연극적 구성. 독설을 품은 사랑과 달콤한 위선의 대결. 애교점 화장에 가발을 쓴 남성과 총과 갑옷을 입은 여성을 통한 성역할의 전복. 수렴청정에 가까운 여왕과 말버러 부인 관계에 자동 연상되는 우리 상황. 지체 높은 분들의 성적 행위는 삽입에 곤란을 겪고 실제 관계는 거리나 매음굴에서만 가능한 통로가 막힌 현실. 권력을 향해 간계와 음모를 일삼고 선의를 벗어던진 인물들의 대결. 저속하고 매력적이다.
역시 란티모스의 세계는 살벌하고 불안하고 그래서 쫄깃하다.
진짜 캐슬이 등장하고 인물의 불안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하고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 인물의 활동과 충돌에 최적화 설계된 공간. 욕망을 위해 차갑게 돌진하는 실행력과 감추지 않는 속물근성. 알고 보면 우주 초고수 앤 여왕은 김주영 쓰앵님, 전횡을 일삼다 여왕의 총애를 잃게 되는 사라는 한서진, 미모와 지략으로 단박에 여왕 옆자릴 꿰찬 에비게일은 공리적 설득에 실패한 이상주의자 이수임 구도의 삼각형을 연상시킨다. 영국 배경의 스카이캐슬 실사판.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과 여인들은 실존 인물이다.
술수와 모략이 설계되고 지체되는 통로로 사용되는 여왕을 향한 긴 복도, 초조한 심리에 집중하게 만드는 핀 조명 역할의 촛불, 세 여인의 신분을 상징화한 무대 미술과 의상까지 궁중 치정극으로서의 볼거리도 풍부하다. 여왕 방에는 아이의 상실로 충족되지 못한 모성애를 상징하듯 가슴을 노출한 여인이, 사라 방에는 기사 복장의 초상화와 당시 남성 전유물인 지식을 상징하는 책꽂이로 각 인물이 표상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디자인했다. 여왕의 사랑을 가로채는 에비게일은 사라의 책을 훔치는 자로 설정, 이 셋이 권력을 두고 성역할까지 바꾸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난해하고 도발적인 감독으로 평가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그린 <더 페이버릿>은 역사의 재해석과 재미로 가득한 정교한 수제품에 가깝다. 표준화되어 단일공정의 기성품만 판매하는 것으로 오인받는 할리우드 공장엔 장인 정신과 숙련된 오뜨 꾸띠르 방식으로 완성된 명품이 언제나 관객을 유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