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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 Jan 09. 2019

14.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것

여행의 끝과 새로운 여행의 시작

스페인어를 배우고, 멕시코 문화를 배운 것 모두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특히 이곳에서 아이들과 지냈던 시간들은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이곳에 와서 이모 친구의 아이를 돌봐줄수있냐는 부탁을 받았었다. 이곳의 이방인인 나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9개월이 된 아기였다. 아기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 어려웠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안아 다치지 않을까, 괜히 놀아주다 울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기를 보는 일은 확실히 힘들었다. 아기는 무겁고, 언제 왜 우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오면 엄마가 자기를 안 봐주는 것을 아는지, 왠지 나를 조금 미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애기가 내가 싫은가 봐.
하고 가족들에게 하소연하기도 했었다. 첫 일 주일은 몸살이 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했다. 고작 두 시간 안고 있었다고 팔에 파스를 붙여야만 했다. 이렇게 지치고 고된 일인 줄 몰랐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그렇게 넉 달 정도 매일매일 나는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매일 만나니 우리는 조금 친해진 것 같았다. 쑥쑥 커가는 아이를 보는 것은 기분이 묘해진다. 처음 봤을 땐 겨우 기어 다니더니, 어느새 토끼 앞니도 생기고 이제는 걸음마도 한다. 엄마! 하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제법 그럴듯해졌다. 언니! 언니라고 해봐, 하고 매일 시켜보지만, 아직 언니는 힘든가 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해줄까?

 나는 멕시코에 오기 전에는 한 개인 까페에서 일을 했었다. 전임자인 한 언니는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 여기 되게 좋은 곳이에요, 저도 여기서 일하면서 많이 힐링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대체 일을 하면서 어떻게 힐링을 받는다는 거지? 하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언니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된 걸까. 이곳에 오고 나서 몇 번인가 악몽을 꿨었다. 계속해서 가족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꿈이었다. 그러다 깨면, 혼자 소리 죽여 울다가 다시 잠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한 날이면,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돌봄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옹알이뿐인 말이지만 그 말소리가 좋았고, 작은 행동에도 배시시 웃어주는 것이 참 위로가 되었다.

아이들이랑 노는 것이 좋아졌다. 이전에는 시끄럽기만 하고,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라서 곤란하기만 했는데. 이모 친구의 아이들은 다들 참 착하고 예뻤다. 한 번은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아기를 안은 채로 내가 걱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첫째 아이가 다가와 외쳤다.

-비와! 언니 집에 못 가겠다!

-그럼 언니는 여기서 살아야겠네~

-와아!

-언니가 안 가니까 좋아?

-응! 언니가 있어야지 엄마가 안 힘든걸

나는 그날이 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겨우 8살짜리 아이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언니랑 더 놀고 싶어서, 정도를 말할 줄 알았는데.

 같이 놀다 나에게 심하게 장난을 치면 이모들이 놀렸다. 너네 그렇게 언니 괴롭히면 언니 내일부터 너희 집 안 올걸? 그러자마자 아이는 안돼! 하고 소리쳤다. 언니 이제 다른 거하고 놀게. 하고는 내가 정말 안 올까 봐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안 오면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보통 아이들은 아기에게 사랑과 관심을 뺏겨 질투한다던데, 이 집 아이들은 막내를 정말 아껴줬다. 재롱을 떠는 아가를 보면 귀엽다고 꼭 안아준다. 첫째 아이는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탈 줄 안단다. 아이 보는 것이 서툰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준 것도 그 아이였다.

 덕분에 아기랑 많이 친해졌다. 처음에는 내가 싫다고 발버둥 치며 밀쳐냈었는데, 요즘은 먹을 것을 주면 얌전히 안긴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처음으로 아이를 재우는데 성공한 날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부르는 자장가에 곤히 안겨 잠드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히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당연하다. 내가 불러주는 자장가는 엄마가 나에게 불러주던 거였으니까. 노래를 싫어하던 우리 엄마가 딸을 위해 열심히 부른 노래였다.

우리는 이모 손에 자랐었다. 대학생이었던 이모는 언니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늘 우리 집에 왔었다. 엄마가 퇴근할 시간이면 우리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함께 엄마를 기다렸다. 한 번은 엄마가 너무 늦으니, 우리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단다.
-이모 지금 몇 시야?
- 응 5시 50분이야.
-엄마는 언제 와?
-6시에 올 거야.
이모 지금은 몇 시야? 하고 울먹거리는 우리에게 이모는 5시 60분, 70분을 말하며 아직은 6시가 아니라고 달랬다. 예전에는 그렇게 이모만 보면 놀아줘! 하는 놀아줘 귀신들이었다는데, 하며 이모가 추억하는 우리의 얘기는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랬던 내가 23살이 되어 이모가 있는 멕시코에 오게 될 줄이야. 그리고 아기를 돌보게 될 줄이야.

누군가가 보기엔 나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또 누군가가 보기엔 나는 모아둔 돈이 하나 없는 한량이었다. 늘 여행을 떠나는 나를 두고 ‘젊을 때 많이 다니는 게 좋지, 지금 다녀둬’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고, ‘지금이라도 저축해놔야지, 또 여행 가니?’하고 누군가는 혀를 찼었다.
 나는 한 명의 사람인데, 신기하게 주변에 평가가 늘 엇갈렸다. 덕분에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늘 헷갈려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성실한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일을 마지막까지 미루는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 같았고, 그렇다면 게으른 사람인가? 라고 생각하면 지난날의 나의 노력이 전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억울해졌다.

 아기 이모가 네가 한국 가면 어쩌지 하며 어깨를 쓸어주었다. 내 덕에 고맙다. 말씀하셨지만 내가 받은 것 역시 만만찮게 컸다.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확실히 힐링이었다. 힐링이라는 말은 싫어하지만, 마땅한 그 외에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고가 있었던 지난여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은 척 연기를 할 순 있어도. 두 번 다시 나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술값을 전부 계산한 친구가 말했다.
-야 근데, 너 병원 가봐야 해. 알지?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친구와 헤어진 그 날 밤 집에 오는 길 내내 울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괜찮은 척해보려 해도 내 우울함은 숨겨지지 않았고,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단 것을 증명하고 싶어 친구를 만났지만, 그것은 오히려 관계를 망치고 있었다.

 한동안은 계속 우울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생각했다. 행복해지려 하면 나 혼자 행복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걸 받았다. 매일 아침 함께 산책해준 마르셀라 아주머니, 브렌다 언니, 아기 이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말이다. 이모에게 특히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이곳에 있으면서 이모가 내 이모인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 너도 언젠가는 극복해야지.
이모가 말했다.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모른다. 이러다가 또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지도 몰라. 모든 걸 다 던져버릴지도 몰라.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노력하고, 꿈을 꾸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힘이 필요했다. 돌아가면 지난번 포기했던 교환학생 신청을 다시 도전해 보려 한다. 이번에는 그냥 유럽 아무 도시를 신청하지 않을 거다. 스페인으로 가고 싶다. 가서 스페인어 공부가 마저 하고 싶어졌다.


 늘 변화를 원했다. 어딘가로 떠나면, 마치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이곳에 와서 내 인생이 변했나? 하면 음, 분명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 아는 크기의, 나만 아는 변화일 거다. 어학원 선생님은 나에게 4개월 만에 엄청난 성장을 한 거라 했다. 그러나 누군가 너 멕시코 가서 뭐 했니, 이제 스페인어 마스터 한거야?하고 물으면, 나로선 할 말이 없다. 내밀수있는 자격증이 하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이, 가서 놀다 만 왔네.’ 또 그럴 것이다. 이제 24살, 동기들이 전부 졸업하고 있는 시기에, ‘내가 많이 성장한 것 같아’ 하는 소리나 하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이제 됐다. 어쨌든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2월이면 다시 한국으로의 귀국이다. 5개월 간에 짧고, 긴 멕시코생활이 곧 끝이난다. 아무튼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란거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19년 새해, 나는 페루로 떠난다.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와 칠레, 17일간의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 그토록 꿈꿔왔던 남미 여행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설레는 한편 두렵다. 그러나 누군가 그랬다. 설렘이라는 단어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아가는 수밖에. 그래, 참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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