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형 씨, 아니, 유인영 씨! 아니, 지금은 유인형 씨인가? 어쨌든 큰일 났어요! 유인형이 컴백했대요!
광고 촬영 현장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들어오는 스태프 때문에 현장이 어지러워졌다. 카메라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를 스태프 쪽으로 돌렸다. 감독은 입을 벌렸다. 매니저와 코디네이터는 왔다 갔다 하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른 스태프들은 나와 소리를 지른 스태프를 번갈아 보며 서 있었다.
컴백이라니, 언제 공백기라도 있었어?
감독이 호통을 쳤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해 보았지만 입가가 벌써 실룩거렸다. 거울을 보고 싶었다. 코디네이터들은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메라에라도 내 얼굴을 비춰 보기 위해 일어서서 카메라 감독 쪽으로 움직였다.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카메라 감독이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 치면서 카메라 감독이 다른 스태프의 발을 밟아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비명에 놀라 카메라를 놓칠 뻔한 카메라 감독이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때문에 내 얼굴을 볼 기회를 놓쳤다. 가면이 잘못된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얼굴이 예전 얼굴이 아니래요.
처음에 소리를 질렀던 스태프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유인형의 얼굴이 바뀌었다면 지금의 내가 원래의 유인형과 더 비슷할 것 같았다. 높은음자리표가 부실하면 낮은음자리표가 위로 치고 올라갈 수도 있다. 아니, 낮은음자리표만으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왜…… 무슨 사고라도 당했어? 얼굴이 변하다니…….
감독이 띄엄띄엄 묻자 스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글쎄, 그사이에 얼굴을 싹 고쳤다지 뭐예요? 고작 성형 수술하려고 잠적한 건가? 정말 연예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촬영은 중단되었다. 화장품을 바른 뒤 웃어야 했는데 자꾸 눈가가 시큰해졌기 때문이었다. 눈가를 비비는 내 모습을 본 감독이 스톱을 외쳤다. 나를 보는 감독의 표정이 싸늘했다. 가면이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었다. 가면이 변해서 감독의 표정도 바뀐 것 같았다. 매니저와 함께 촬영 현장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감독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등에 칼처럼 박히는 것 같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리무진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리무진 앞을 한 여자가 가로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생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차에 타면서 여자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인은 다음에 해 드릴게요.
제 사인까지 하고 다니시나 봐요? 유인형이라는 이름으로?
냉기가 서린 말에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콧대가 높고 눈 밑의 애굣살이 도드라졌다. 입술도 부풀어 있었다. 유인형이 얼굴을 모두 바꾸었다던 스태프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유인형 씨?
이제야 알아보시네요.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유인형은 어깨를 한 번 올렸다가 내리더니 순순히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에게는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매니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유인형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제 역할을 대신해 줘서 고마워요. 가족들도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제 자리를 돌려주세요. 순순히 돌려주시면 고소는 안 할게요.
고소요?
네, 저를 사칭했으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 유인형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인형의 눈에 내 가면이 들어찬 것 같았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가면이 다시 간지러워졌다. 이번에는 허물이 벗겨지려는 듯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왼쪽 뺨을 만져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저를 닮긴 닮았네요. 이제는 제가 저를 유인형이라고 해도 아무도 안 믿고, 그쪽이 말해야 믿을 것 같아요.
유인형의 말에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사칭한 게 아니에요. 유인형 씨가 잊히지 않게 도와준 거예요. 봐요, 내가 활동하고 나서부터 유인형 씨에 대한 악플이 사라졌어요. 무플은 말할 것도 없구요. 유인형 씨가 높은 자리에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나도, 나도 운이 좋았다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어요. 우리는 얼굴이 똑같잖아요. 그 운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갖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사극의 긴 대사를 한 번에 말한 것처럼 숨이 찼다. 유인형이 인중을 긁었다. 입술도 삐죽였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이 수탉의 벼슬처럼 보였다. 그 입이 금방이라도 가면을 찢을 것 같았다. 붉은 입술이 열리면서 뾰족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 세상에 유인형은 한 사람뿐이에요.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면이 벗겨졌다. 처음에 가면을 주워서 썼을 때 쉽게 스며들었던 만큼 벗겨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가면을 주워 올리려고 했지만 가면은 사라지고 없었다. 바닥에서 잡힌 건 아까 먹다가 남겨 두었던 오렌지 주스 병뿐이었다. 얼굴을 만져 보았다. 오랫동안 스킨과 로션을 바르지 않아 까칠한 피부가 만져졌다. 맨피부였다.
유인형이 내 얼굴을 제대로 보기 전에 차 문을 거칠게 열고 유인형을 밀었다. 바닥으로 밀쳐진 유인형이 발목이라도 삐었는지 신음을 내뱉었다. 차 문을 다시 세게 닫으면서 밖에 있던 매니저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낀 매니저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차 문을 열고 매니저의 어깨를 세게 치자 그제야 매니저가 허둥지둥 운전석에 올랐다.
차가 출발했을 때 무심코 창문을 보았다. 차창 너머에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 이목구비 중 입만 선명했다. 남자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창문을 닫아 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도 그 발음이 하나하나 들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유인형 씨를 닮았네요. 꼭 닮았어요.
유인형 : 데뷔한 뒤 숨 쉴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높은 위치에 있는 제 모습을 본 순간 오히려 우울증이 생기더라구요. 더 높은 데 못 올라가면 어쩌지? 한순간에 추락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자신감도 떨어지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어요. 음악 프로그램 1라운드에서 떨어진 뒤 가면을 딱 벗고 화면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데, 아…… 제 얼굴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때만큼 제가 미워 보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거울을 안 봐도 되는 곳으로 도망쳤어요. 가면을 벗었을 때의 제 모습이 너무 미워서.
기자 : 그동안 어디에 계셨어요?
유인형 : 수녀원에 있었어요. 진짜 수녀가 될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어요. 그곳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 필요가 없었어요. 정말 편했어요.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오신 수녀님 한 분이 말씀해 주시더라구요.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그래서 인영 씨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분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저도 좋은 경험 했지요. 나중에 수녀가 주인공인 작품에 출연하면 잘할 것 같아요. 코미디도 괜찮고, 정극도 괜찮고…….
기자 : 그런데 모습이 좀 달라지셔서…… 음, 유인형 씨의 원래 얼굴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죠? 유인영 씨를 다시 불러야 할까요? 쌍둥이 가수처럼 쌍둥이 배우로 같이 활동하시는 건…….
유인형 : 그건 싫어요. 이제 얼굴이 똑같지도 않잖아요? 조금 섭섭하시겠지만, 제가 새로운 가면을 썼다고 생각해 주세요. 얼굴을 바꾸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저도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살려구요. 달라진 건 없어요. 제자리로 돌아온 거예요.
오피스텔로 짐을 찾으러 갔다. 그동안 살던 오피스텔을 오늘 당장 비워 주어야 했다. 유인형이 내일 그 오피스텔에 이사 올 것이다. 집주인에게 연락해 보니 전에 살았던 지하 원룸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내일부터는 그곳으로 가면 된다. 기획사 사장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제 로봇 같은 유인형은 필요 없어진 것 같았다.
오피스텔로 가는 길에 장례식장의 간판을 발견했다. 발걸음이 저절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 안에는 두 개의 영정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얼굴은 유난히 닮았다. 앳되어 보이는 어린 쌍둥이들은 양 갈래머리를 단정하게 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영정 사진 앞에서 절하는 척하다가 엎어졌다. 엎드리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구석에서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쌍둥이들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려는 눈치였지만 여자는 곧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엎드린 채 실컷 울 수 있었다. 눈물방울이 바닥에 고였다. 돈으로 셀 수 없는 눈물이었다. 그 눈물 위에 엎드려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유인형 씨를 닮았네요.
나를 일으킨 건 익숙한 목소리와 그만큼 낯설지 않은 내용이었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이라 어지러웠다.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 준 건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청년의 아버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목구비가 청년의 아버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눈에 고인 눈물을 주먹으로 비벼 떨어뜨린 뒤 남자를 다시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아까보다 창백해져 있었다. 주먹으로 눈을 한 번 더 비볐다. 아까보다 또렷해진 눈에 남자의 얼굴이 담겼다.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청년의 아버지가 맞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나를 망쳤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분을 이기지 못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청년의 아버지를 닮은 가면이 자라고 있었다. 새싹이 자라는 것처럼 조금씩 솟아난 흰 가면이 남자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남자에게 스며드는 가면을 보며 외쳤다.
그래도 없는 게 아니야. 나도 같이 살고 싶어. 나를 구해 줘!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가면을 쓴 남자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리가 대체 어디죠?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남자가 새까만 입을 벌려 대답했다.
낮은, 낮은 자리입니다.
내 자리는 이제 거기가 아니야! 포기 못 해!
큰 소리로 외치면서 남자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면을 벗겨 내고 싶었다. 길게 뻗은 손끝에 가면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가면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번에 남자의 가면을 뺏어 오면 다시는 뺏기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가면은 잘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연주할 기회가 다시 생긴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남자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가면은 생각보다 딱딱해 보였지만 쓰기만 하면 피부에 잘 스며들 것 같았다. 가면이 가까워졌다. 소름이 끼쳤다. 손을 조금 더 뻗었다. 남자는 내가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나의 눈동자에 담았다.
가면을 곧, 줍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