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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랑 Mar 04. 2020

여권을 안 챙긴 채, 암스테르담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첫날

한국에서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독일 교환학생을 위해 유럽으로 왔다. 나를 보러 브뤼셀까지 왔고, 브뤼셀에서 3일을 보내고 함께 암스테르담 여행을 가기로 했다. 금요일 아침 9시 버스였다. 유럽 여행에서 자주 탄다는 플릭스 버스를 예매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였고, 아침으로 초코잼과 머스타드, 닭고기, 꿀이 섞인 소스를 바른 빵도 챙겼다. 작은 캐리어가 없어서 보스턴백에 짐을 챙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친구도 짐이 많았다. 친구가 캐리어를 들고 왔는데 계단이나 돌길에서 끌기가 매우 불편했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시작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트램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여권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덜란드가 아무리 같은 EU 국가여도 다른 나라인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온 것이다. 집에 돌아갔다 올 시간이 없어서 트램을 타긴 했는데 플릭스 버스를 탄 후기들을 아무리 찾아봐도 일단 여권을 검사하게 되면 원본이 없으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글들만 있었다.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건 아예 ID나 여권 검사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한테 어떤 경우의 수가 펼쳐질지는 닥쳐봐야 알았다. 게다가 만약 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갈 때는 검사를 안 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브뤼셀로 돌아올 때 검사를 한다면? 브뤼셀로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권 대신 ICHEC 학생증이 있어서 일단 플릭스 버스 기사한테 여권이 꼭 필요한 건지 물어보기로 했다. 버스가 3대 정도 있었고 첫 번째 기사한테 물었을 때는 본인은 경찰이 아니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포기하고 친구는 먼저 버스를 타고 간 다음 나는 집에 가서 여권을 들고 다음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사는 내가 탈 버스의 기사가 아니었다. 내가 타야 할 버스의 기사한테 가서 다시 한번 물었더니 "No problem"이라고 했다. 의심스러워서 두 번 정도 다시 물어본 것 같은데 그때마다 질문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Really.."라는 한 단어만 듣고 "No problem"을 외쳤다. 결국 버스에 탔고 그래도 여권을 가지러 갈까 말까 하는 사이 버스는 출발했고, 돌이킬 수 없었다.


지금부터 여행 내내 걱정해봤자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여행부터 여권을 까먹을 일은 없을 듯하다. 2시간 45분 동안 타야 했고 국경을 넘을 때쯤 긴장이 됐다. 버스를 세워서 경찰이 들어와 여권을 보여달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며 인종차별도 심해져서 더 걱정이 됐다. 다행히 그런 일은 있지 않았고, 어딜 갈지 정하고 1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있었다.

마지막날 유일하게 해가 떴을 때 찍은 페리

우리가 예약한 호스텔로 가기 위해서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가서 페리를 타야 했다. 페리는 3-4분에 한 대꼴로 운행하는 무료 교통수단이다. 타보기 전에는 '어떻게 저렇게 자주 있고, 심지어 공짜지?'라고 생각했는데 타보니 왜 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5분도 채 안 가서 내린다.(ㅋㅋㅋㅋ) 처음에는 정말 웃겼다. 여행하는 3일 동안 숙소에 가기 위해 페리를 꽤 여러 번 탔는데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오자마자 브뤼셀과 가장 다른 점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브뤼셀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교통권이 비싸서 그런 것 같다. 1시간짜리 교통권이 무려 3유로, 한화로 환전하면 약 4-5000원 정도다. 나 같아도 이 돈 주고 버스나 지하철 타느니 자전거 사서 타고 다닐 것 같다. 여행 동안은 1일권을 8유로에 사서 타고 다녔다.

칠리 가라아게. 미역볶음이 아주 맛있었다.

도착한 때가 점심시간이라 배가 고팠다. 중앙역에 도쿄스시라고 일본 음식을 파는 곳이 있어서 칠리 가라오게랑 라멘을 먹었는데 유럽 와서 사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높은 물가를 자랑하는 암스테르담치고는 가격도 적당했다. 모처럼 먹은 매운 음식과 국물이 너무 좋았다.

네덜란드 왕궁

첫날, 네덜란드 왕궁과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는 전혀 오지 않았다. 우선 네덜란드 왕궁에 갔는데 생각보다 소박했다. 왕궁은 좀 더 화려해야 할 것 같았는데, 브뤼셀 시청사 건물이 훨씬 더 멋졌다. 그랑 플라스가 왜 유럽의 3대 광장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눗방울을 만들어주시는 할머니가 계셨고,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엄청 좋아하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왕궁 앞 광장 한 켠에는 비둘기가 잔뜩 모여있었다. 사람들이 먹이를 주니 자꾸 몰려들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비둘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랑 친구는 정말 열심히 피해 다녔다. 일기예보에서 5시쯤 비가 온다고 했는데 정말 5시가 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 미술관에 가려면 네덜란드 왕궁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더 간 뒤,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지하철에서 내렸더니 비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 바람이면 태풍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바람이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13m/s로 바람이 불었었다. 서울과 브뤼셀을 확인해보니 각각 1m/s, 10m/s였다. 암스테르담 바람은 정말 미친 것 같았다. 비바람이 부니 비가 가로로 내렸고, 우산으로 앞을 막느라 주변을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반 고흐 미술관에 도착하니 온 몸이 비에 쫄딱 젖어있었다. 유럽인들이 왜 우산을 안 쓰는지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다 젖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술관 안에 옷과 가방을 맡기는 곳이 있었고, 젖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덜어낸 뒤 입장할 수 있었다. 반 고흐 미술관을 기대하고 온 이유는' 반 고흐가 들어 본 화가라서'도 있지만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해주기 때문이었다. 현대자동차에서 후원하던데, 덕분에 뜻깊은 경험을 하게 돼 감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반 고흐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해바라기, 고흐의 방 정도의 작품만 알지 반 고흐의 다른 작품이나 인생은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방문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트리>

가장 좋았던 건 '아몬드 트리' 작품이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빈센트와 동생 테오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빈센트가 폴 고갱과 싸우고 귀를 자른 뒤, 정신 병원에 있을 때 테오에게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테오와 테오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빈센트로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빈센트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아몬드 트리를 그려서 선물로 줬다.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아몬드 트리는 겨울(?)에 역경을 뚫고 꽃을 핀다고 한다. 새로운 생명에게 아주 적합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았던 대목은 다음이다. 그렇게 선물을 받은 테오의 아들 빈센트가 나중에 내가 지금 서있는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빈센트에게 다른 형제가 있었음에도 각별했던 테오와의 사이와 조카의 보답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폴 고갱의 <두 명의 타히티 여인>

반 고흐의 그림을 칭찬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농촌, 자연을 존경했던 반 고흐는 농사짓는 사람들에 대한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런데 미술관 내에 있는 수많은 그림 중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보기에 불편한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폴 고갱은 동양인 여성의 누드화에서 가슴 앞에 과일을 놓아 '성적으로 취할 수 있는 미개한 여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인 '키스'는 벼랑 끝에서 남성이 여성을 붙잡아주고 있는데 남성이 놓으면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는 여성의 수동성을 나타낸다. 생각해보니 '여성과 예술' 시간에 배웠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화가 중에 반 고흐는 없었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을 한 거라고 생각해 추켜세우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그의 그림을 볼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무려 3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고 나오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비바람도 여전히 거셌다. 물가가 너무 비싸서 저녁은 마트에서 사서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원래는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지쳐서 냉동 피자랑 샐러드랑 청포도를 샀다. 근데 피자를 너무 작은 걸 사서 먹어도 배가 안 찼다. 내일 저녁은 꼭 푸짐하게 사야 겠다고 다짐했다. 저녁 먹고 나니 벌써 10시였다. 호스텔은 4인실이었는데 나랑 친구 말고 백인 남자가 한 명 있었다. (혼성이 여성전용보다 훨씬 쌌다..) 딱히 불편하진 않았는데 코를 진짜 미친 듯이 골았다. 이어 플러그를 꽂아도 방이 진동해서 소용이 없었고 결국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인충동이 이래서 일어나는구나 싶었지만, 이렇게 고생도 해보는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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