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투잡을 시작했다

by 에린하

제주에 내려온지 약 4주째에 접어들었다. 친절한 직장 동료들과 회사에서 3분 거리의 사택 덕분에 제주 ‘직장’살이가 안착되고 있다. 일과중에는 상담과 출석에 치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칼퇴를 하면 저녁있는 삶을 누릴수 있기에 용돈벌이를 하고자 배민라이더를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배달을 거의 이용하지 않아서 배달 수요가 이렇게까지 많은 줄 몰랐는데 주변 프리랜서 친구들이 짬날 때 배민, 쿠팡이츠 라이더를 하는 걸 보니 아 이거 제법 쏠쏠하겠다 싶더라. 내 경우는 평일 저녁 1시간 혹은 두시간 ‘추가 근무’를 해서 일주일에 딱 10만원을 버는게 목표였다. 두달 동안 80만원이 목표인데, 이는 내 첫 서핑보드를 장만하는데 필요한 금액이다.


친구들이 배달을 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나에게 배달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아주 정형화되어 있었다. 막무가내로 도로위를 누비고, 형형색색의 라이트나 큰 음악소리를 틀어대며 보행에 위협이 되기도 하는 사람들. 물론 그렇지 않은 라이더 들이 훨씬 많은 거 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들의 이미지가 아주 편협한 것도 인정한다.


그러다 2년전 겨울, 친구가 배달할 때 따라다니며 라이더를 몸소 체험해봤는데 이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마음 한쪽이 어색했다. 비대면이라 해도 혹시 직장 동료와 마주치면 어쩌나 싶은 생각.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굳이 번잡해지고 싶지 않아 마스크를 썼다.


배민의 시스템은 생각보다 정교하고, 라이더가 스스로 선택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매끄럽다. 배달 시작 버튼을 누르면 AI가 목적지를 건네주고, 나는 그저 안내에 따라 움직인다. 음식점 문을 열고 음식을 받아 들고, 골목과 언덕과 신호등을 지나 고객의 문 앞에 음식을 두고 사진을 남긴다. 한 건은 그렇게 끝난다. 2천 원에서 2,500원 사이의 보수, 간혹 멀리 가면 3천 원대. 제주에서도 사람이 가장 모여 사는 동네라 주문이 끊기지 않는다. 두 건이 동시에 들어오면 두 가게를 거쳐 비슷한 경로의 집을 순서대로 방문하면 된다.


어제 두 시간 동안 내가 옮긴 음식들은 마라탕, 치킨, 빵, 중식, 삼겹살, 버블티… 깊은 밤에도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걸 먹는구나.


나는 전기자전거를 통해 이동하는데 오토바이보다는 안전하고, 일반 자전거보다는 속도감이 있어서 사람이나 차가 많은 우리 동네에 제격이다. 처음엔 미숙했다. 브레이크를 잡지 않은 채 끌고 가다가 자전거가 앞으로 튀어나가는 바람에 한쪽 다리에 무게를 그대로 맞았다. 버스 환승정류장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황급히 일으켜 세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는 찰나에 생각이 스쳐갔다.


배달 첫날부터 다치다니, 쉽지 않은 여정이구나. 이러다 아파서 병원비가 더 나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찰나에 스쳐지나갔다.


두 시간 동안 벌어들일 시급과 그와 교환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로스터리 카페에서 라떼 넉 잔, 저렴한 카페에서는 일곱 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내일은 조금 맛이 없지만 회사 커피 머신으로 아메리카를 뽑아 마셔야지라고 다짐하며 다음 배달을 위해 이동했다. 배달 4건을 처리하고 나니 벌써 한시간이 훅 지나갔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는 끝없이 번지는 잡생각이 나를 잠식하곤 했다. 하지만 도로 위에서는 그럴 겨를이 없다. 길을 확인해야 하고, 보행자와 차량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특히 내가 주로 배달하는 지역인 시청근처는 언덕이 많아서 아무리 전기자전거라 하더라도 오르막 내리막 길이 가파를 경우 안정감을 찾기 위해 브레이크를 잡으며 긴장을 해야 했다.


쌀쌀한 제주 바람을 견디려 얇은 목티에 후리스, 패딩, 목도리까지 챙겨 입었더니 달리기도 전부터 땀이 배었다가 금세 식어버렸다. 그런데 바람을 가르며 달리다 보니, 차가운 공기와 식은 땀이 엇갈리며 이상하리만큼 개운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단순한 노동의 감각. 육체노동이 정신노동보다 고귀하다거나, 그 반대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머릿속을 치우듯 공백이 생기고, 동료들의 기분을 살필 필요 없이 오로지 내 방향만 바라보면 된다는 사실이 낯설 만큼 편안했다.


배달은 내 생계가 아니어서 절박함은 덜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절박해야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동네의 불빛과 바람, 계절의 변화까지 천천히 받아들이며 라이더 생활을 해볼 생각이다. 오늘 저녁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