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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세살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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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미 Oct 20. 2024

잔디밭 전시회

루아의 그림

  "프. 사에 있는 그림 내가 살 수 있니?"

사촌언니가 프로필 사진을 보고 오랜만에 말을 걸었다.

"이사할 집에 걸고 싶어. 내 맘에 쏙 들어!"


 루아가 미술학원에서 전시회를 준비하며 그린 꽃밭 그림이다.

자기 몸보다 더 큰 캔버스를 한 달 동안 칠하고 덧칠해서 완성한 작품을 보니

대견함이 차올라 뭉클했다. 6세에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그림을 못 그리는 고슴도치 어미는 그저 입이 떡 벌어졌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루아와 함께

처음으로 멀리 떠난 여행을 담은 풍경이라 더 마음이 갔다.

좋아하는 계절에 만난 나무, 꽃, 동물들을 루아만의 감성으로 표현한 그림을 보고

내 마음까지 환하고 시원한 가을이 되었다.

 "얼마면 되겠니?"

원빈보다 더 유혹적으로 다가온 톡 메시지에 어깨가 한없이 올라가며

루아의 첫 작품이니 팔 수 없고 다음 작품을 선보이겠노라고, 많은 후원부탁드린다

너스레를 떨며 수다를 마무리 지었다. 겸사 언니의 근황을 업데이트하다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모의 큰딸인 언니는 나와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난다. 벌써 두 딸 중에 큰 딸을 시집보내고

딸의 신혼집인 동탄 근처로 이사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언니도 곧 할머니가 되겠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방학숙제를 봐주던 언니. 사립대에 다니는 스타일리시한 여대생.


 언니는 대전으로 유학 온 고등학생 남동생과 함께 우리 집 뒤편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유치원이 끝나면 종종 언니에게로 가서 놀았다. 생각해 보면 조금 부유한 대학생이었던 것 같다.

취미로 베이크, 지점토, 그림 등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와서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가끔 엄마와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오븐으로 빵을 구우는 날이면 달콤한 향이 진진했다.

여대생의 집이 전업주부들의 예술 아지트로 쓰인 셈이니 언니는 여러모로 참 싹싹한, MBTI로 치면 파워 E 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메이커였던 조이너스 정장과 사자머리 파마를 한 언니는 유치원생인 내 눈에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텔런트 보다 예쁘고 자유로워 보였다. 엄마 몰래 립스틱도 발라주고

화장대와 옷장을  구경시켜 줬다. 그때부터 나는 꼭 대학을 가야지! 마음먹었던 것 같다.

대학을 가면 마법처럼 예뻐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니의 잘생긴 남자친구(지금의 형부) 마저도 지금으로 치면 파워 E가 아닐까 싶은데,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시내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그때 레스토랑이라는 곳도 처음 가보고, 돈가스도 처음 먹어봤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메뉴판에서 돈가스를 골라준 언니와 형부. 신혼부부 놀이하듯이

우리를 기꺼이 대학생 데이트에 끼어주었다.


"언니, 왜 밥이 접시에 나와?"

생전 처음으로 본 판판한 눌린 모양의 쌀밥이었다.

커플은 박장대소하며 여기에 먹으면 더 맛있다며 돈가스를 썰어주었다.

그날부터 접시에 나오는 밥을 보면 그때 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되직한 밥과 돈가스의 맛이 생각난다.

그 후로 먹은 어떤 돈가스도 그 맛을 능가할 수 없을 것을 정도로 맛있었다.

식사 신동 수준이었던 나와 동생은 수프부터 접시에 나온 밥과 돈가스를 설거지하듯

깨끗이 먹었다. 영화 <황해>의 배우 하정우 수준으로 국물을 들이키며 밥을 맛있게 먹는

루아를 떠올리니 유전자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루아가 한 달 동안 공들인 작품이 학원 앞 잔디밭에 전시됐다.

오며 가며 보시라 (학원 홍보이긴 하겠지만) 초대장도 만들어주셨다. 루아의 요청으로

어린이집 키즈노트에 올렸더니 선생님과 친구들이 (루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둥소리보다 더! 어엄청 크은! 박수소리로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꼬맹이 사촌 동생이 귀여워 돈가스를 사주고, 돈가스와 접시밥을 먹어치우던 꼬맹이가 자라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이 할머니가 된 언니의 집에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세월 참...


쉬지 않는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어떠한 길로 가는지 몰라도 흐르다 보니 나이가 들고 길이 되었다.

어떻게 사는지는 몰라도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루아가 그린 꽃밭처럼 언니의 중년이, 언니 딸의 신혼이,

우리의 길이 순간순간 꽃향기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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