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나는...
목이 까끌하고 몸이 으슬으슬한 게 여름 감기가 오나 보다. 아이의 기침이 나아가면 감기는 영락없이 내게로 온다. 좀 지나쳐주면 좋으련만. 아이를 등원시키고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코가 휘어있어서 계속 막힐 거예요. 평소에 불편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콧 속 사진을 보여주면 왼쪽과 달리 오른쪽 코뼈가 휘어져 붓고 더 막힌다고 한다. 이거 불편할 텐데, 하시며 한쪽씩 비교해서 숨 쉬어보라 하셨다.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숨 쉴 때가 숨이 덜 들어오는 기분.
아, 나는 조금 '답답한 숨쉬기'를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숨이 좀 막히는 기분을 가끔 느끼는 건가.
생각을 이어가니 답답한 숨쉬기만큼 둔감을 알아차린 순간이 있었다.
헬스장에서 PT운동 중에 선생님께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고 했더니
"평발이네요. 모르셨어요?"
마사지를 받는 중에도
"아우 일자허리네. 허리 안 아팠어요? 심한 것 같은데.
다리도 잘 붓는 체질이네."
몸을 잘 안 써서 생기는 통증이겠거니, 사람마다 이 정도의 아픔은 다 가지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무심함과 무지함 중간에서 머쓱해졌다.
가볍게 찾아간 병원에서 코와 목 어디쯤 쑤욱 약을 집어넣는 시술을 받고, 주사를 맞았다. 수술을 고려해 보라는 무서운 얘기까지 들으니 진이 빠졌다. 간신히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이어 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꾸미기에는 조금 지쳤고 이미 꾸며진 일들에는 마음이 선뜻 닿지 않습니다. 이러한 닫음이나 닫힘이 좋은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냥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 정도록 경계와 반성을 대신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간이 무엇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뭉근한 침묵과 함께 말입니다.
-박준, <계절 산문> 중에서
요즘의 나는 둔감을 넘어 무감각한 날들의 연속이다. 시인의 말처럼 이런 닫힌 일상이 삶의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나마 쓰는 일로 고기를 부드럽게 저미듯 반성과 다짐을 다지고 있다.
처방된 약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숨 잤더니 숨쉬기도 더 편해졌다. 그나저나 몇 시지?
시계를 보니 3시 50분!!!
아이를 태운 버스는 3시 51분 도착이다.
왜 오늘따라 알람이 꺼져있던 것일까. 원망할 새도 없이 뛰어나갔다.
조금만요! 5분이면 돼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화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굽신굽신 통화를 했지만
결국 버스는 떠났다.
"어머님, 다른 아이들 학원시간이 있어서요. 이따가 맞은편에서 내릴게요."
셔틀버스 꽁무니를 쫓아가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놓친 적은 없었는데
잠깐의 자책을 끝내고 정류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아이의 얼굴이 그렁그렁하다.
엄마가 안 나와서 울었으려나 우는 표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찌르르... 온몸이 아린다. 요즘은 그렇다.
내 몸의 작은 통증보다 나는 아이의 몸에 상처가 나거나 아파하면 통증으로 반응한다.
뉴스에 아이들의 학대, 폭행 사건만 봐도 뼛조각이 어긋나는 느낌으로 아파서 뉴스를 잘 못 볼 때도 있다.
"엄마가 안 나와 있어서 죽은 줄 알았어."
아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울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죽음에 대해 불안과 생각이 많아진 6세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엄마가 정말 죽은 듯이 잠이 들어버렸어. 미안해. 근데 잘 자서 건강해졌어."
모리 준이치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아무 말도 없이 딸 이치코를 버리고 시골집을 떠난 엄마는 오랜 후에 편지 한 통을 보낸다. 편지에는 그런 고백이 적혀 있다.
자신의 인생은 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하는 것 같았다고.
언제나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그런데 지금 와 돌아보니 그건 원이 아니라 나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무심하고 무감각한 날들이 이어지고 나와 다른 에너지의 사람들을 부러워하다가도 마음을 고쳐 먹는다.
지금의 하루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지낸다. 늘 제자리걸음 같지만 실은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닌 나선으로 걷고 있는 걸 거다. 나만큼 복잡한 사람도 없지만 또 나만큼 귀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아이와 함께 배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