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으로> 를 읽고
한 여성이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방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언어가 가진 자원이 훨씬 늘어나야 하고
모든 단어들은 날개를 달고 뻗어 나가 파격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겁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여성 창작자 10인이 각각 '자기만의 방'에 관하여 쓴 수필집. <자기만의 방으로>
동네 도서관에 신착 도서 신청을 했더니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었다.
처음만 누릴 수 있는 책의 뽀얀 속지를 보니 백화점에서 주문한 새상품을 받은 것처럼 설렌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모티브로 각자의 작업실 혹은 공간, 재질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는 책을 보며
작가의 작업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업실은 미국 HBO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 캐리의 집이다.
칼럼을 기고하는 프리랜서 작가 캘리 브래드쇼의 집이 내 로망이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캘리는 긴 시즌 끝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뿌리가 된 아파트 작업실은 팔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해외로 갔을 때도 작업실만은 여러 이유로 그대로 두게 된다.
그 작업실은 먼 길을 돌아돌아 만난 사람에 대한 상처가 깊어졌을 때도 삶에 회의가 느껴졌을 때도
내가 나임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 되는데 그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현실세계에서 살던 집을 두고 결혼하기란 쉽지 않았고, 처음 (이름만)작업실을 갖게 된 것은
결혼 후 처음으로 가진 작업실 방이다. 선물로 받은 아레카 야자와 어울릴 핑크 벽지도 고르고
'아티스트 스튜디오'라는 거창한 푯말도 붙여두었다.
나의 로망이었던 책꽂이 없는 넓고 반듯한 원목 책상을 들였다.
대단한 것을 쓰지 않아도 내 작업실은 꼭 갖고 싶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창작을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남편은 전원 대기 모드에도 불이 번쩍 번쩍 빛나는 최신 사향의 컴퓨터를 장만했다. 게다가 키보드는 손가락을 움직일때마다 네온색의 불빛이 나오고 타자기 소리에 버금가는 타격감 만점의 최신형 키보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을 하기 최적화된 장비가 분명했다. 그 검고 거대한 기계들은 모두 나의 네모 반듯한 책상 위에 자리 잡았다. 나의 로망은 책상의 여분만큼 반토막(그 이상)이 났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화이트+핑크 벽지로 재정비한 아이의 놀이방이 되었다.
아이는 방 안에서도 인디언 텐트와 쿠션을 이용해 또 하나의 방을 만든다.
캠핑장에서 본 것처럼 책을 쌓아 불을 피우고 담요를 깔아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어서 들어오라고 한다.
"작지만 포근한 내 방으로 놀러와."
간신히 누어 텐트 안에 머리만 들이밀면 친절하게도 가지고 있는 머리핀을 죄다 꽂아 꾸며준다.
누어서 아무것도 안 할 수있는 달콤하고도 따끔한 시간이다.
"정말 예쁘네요!"
만족스러운 리액션 후 세상 화려한 머리로 하원길에 본 꽃과 하늘을 그린다.
뭐든 창작해보리라는 마음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나에게 생각치도 못한 삶을 가져다 주었다. 아이를 돌보는 건 순간순간 벅찬 행복감을 주지만 나의 경우, 나머지 긴 호흡 끝에는 한숨이 많아진다.
나에 대한 못미더움으로 나를 지워내는 시간이 늘어간다. 그럼에도 뭐라도 쓰려한다. 앞으로 나아가진 못해도안으로 안으로 들여다보며 마흔의 무력감과 잘 지내보려 한다.
혼수로 들인 네모 반듯한 나의 책상은 식탁이자 작업대로 매일 닦으며 쓰고 있다. 3분의 2이상 다른 물건이차지하지 않도록(나에겐 생각보다 어려운 일) 유지하면서 말이다.
<자기만의 방으로>에서 만난 문장들
설화
(중략)
설화는 생후 2개월 추정일 때 논두렁에서 오빠 강아지와 함께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아마 떠돌이 개의 새끼일 거라고 보호소에서 추측했다. 논두렁의 짚 더미에서 태어났을 때 설화는
어미 개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여기가 우리 방이야.", "그리고 어느 곳이든 우리의 방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나 역시 설화에게 배운다.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 우리의 방이 될 수 있어."
매릴 모양을 달리하는 저녁달, 꽃을 마주 보고 있는 벤치, 볕이 잘 드는 카페, 단지 안의 놀이터....
그곳에 앉아 설화를 쓰다듬으면 미소를 짓게 된다.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싼 안온한 입방체는 우리가 일어서면 또 홀연히 사라진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손과 발을 닦고 방 안에 들어오면 설화가 따라 들어온다.
- 박세미, '나를 구축하는 질료들' 중에서
내가 잘 지내고 싶은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나다.
이상한 말이지만 혼자인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너무 싫어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혼자인 사람은 자기 안에 갇히기 쉽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부터 지나치게 영향받는다.
그런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면 사는 일이 괴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덜 싫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진 허물을 속속들이 알고도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늘 그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다만 조금이라도 덜 싫은 사람,
혹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순간을 노력해서 만들어볼 수는 있다.
그런 시간을 되도록 자주 경험하는 것이 내가 아는, 나와 잘 지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혹이 없는 상태라서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는 공자의 말이나,
'중년의 위기middle-life crisis (중년기에 진입하게 되면 삶의 공허와 정체감의 혼란을 느낀다)'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는 발달심리학자들의 말도 별로 위안이 안됐다.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자 최소한의 에너지만 소비하기로 한 생물처럼 몸과 마음을 쓰는 일에 인색해졌다.
내 세계는 빠르게 작아졌다. 빛도 소리도 없는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앚아 끝내는 감각을 상실해 버린 심해어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삶의 동력은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그때 어떤 문장 하나가 내게 왔다.
"멀리 가되, 반드시 돌아와야 하고." _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시작법서를 읽다가 문득 알았다. 내가 한 시절을 떠나 이제 새로운 때를 맞았음을.
멀리 가는 날들을 지나왔으니 이제는 돌아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헤세가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는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 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_헤르만 헤세, <데미안>
라고 쓸 때의 나이가 마흔둘이었던가.
나이드는 일이란 나를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이르는 것이었나.
나는 혼돈의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내가 맞닥뜨린 괴로움의 이면을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 등을 맞대로 있는 것이라면 낯선 그림자 뒤에는 새로운 빛이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돌아온다는 게 뭔지, 어디로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애초에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사는 일에 답이 있을 리가. 다만 삶의 감각이 형식으로부터 얻어진ㄴ다는 것만은 알겠다. 의식보다 행위를, 일회적인 감동보다는 차곡차곡 쌓아서 얻은 실감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도. 한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실체는 결국 반복되는 행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단촐해진 중년의 삶이란 어쩌면 형식을 만들어보기 딱 좋지 않은가.
(중략)
나이드는 일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라고. 내게로 이르는 길은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해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다. 오랫동안 나를 비껴만 갔던 그 말들이 이제는 나를 향해 쏜 화살처럼 온다. 목소리는 온화하다.
- 무루, '나에게로 이르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