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지 않고 어수선한
들뜨다 | 동사
(1) 마음이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아니하고 조금 흥분되다.
들뜬 기분.
축제 기분에 들뜨다.
(출처: 우리말샘)
지난주에 첫 눈이 내렸다. 통상적 기억으로 첫 눈은 애매하게 와서 왔는지, 안 왔는지 눈치를 못 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진짜 펑펑 내렸다. 창 밖을 내다 보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겨울잠을 한 달 간 잤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겨울 모습이었다. 마침 밖에 나갈 일이 있어서 눈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미처 떨어지지 못한 단풍잎과 주황색 홍시, 샛노란색 모과 위로 눈이 덮여 있었다. 하얀 세상에 울긋불긋 빨간색, 노란색, 갈색, 초록색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마치 샤갈의 「나와 마을」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로 알고 있었던 1인...)
눈이 오면, 특히 첫 눈이 오면 괜스레 들뜨는 것 같다. 사실 눈이 온다고 들뜰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짜증이 나야 정상일 것이다. 도로는 막히고, 지하철도 가끔 지연되고, 걸어다니면 신발과 바지 밑단이 젖고, 자칫하면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왠지 눈이 오면 마음이 이상하다. 괜히 추워서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나가고 싶고, 출근 길이 험난할 것을 알면서도 더 내렸으면 좋겠고, 며칠 간 녹지 않고 버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이런 걸까? 왜 눈이 오면 마음이 이상하게 붕 뜬 것 같을까?
첫째로, 눈 내리는 모습은 좋았던 기억과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들뜨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눈 내리는 날, 놀이터에 사람이 많았다. 내가 미취학 아동일 시절에는 친구와 딱히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놀이터에 나가서 있는 친구들과 놀았다. 나갔는데 친구가 없으면 냅다 그 친구가 사는 아파트 앞에 가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OO야~ 놀자~" 그렇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 (죄송합니다 아파트 주민 여러분... 제가 목소리가 컸어요...) 눈 오는 날에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매 시간 친구들이 많았다. 눈사람을 만들고, 내 꺼가 더 잘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눈싸움을 하자면서 눈사람 머리를 냅다 들어 던지고...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순수하게 놀았던 기억이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들뜬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닐까.
둘째로, 개인적으로는 눈을 볼 수 없는 겨울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곰돌이 인형이 있는데, 흰색이다. 당연히 흰색이면 북극곰이라 생각했고, 북극곰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원인인 지구온난화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 언제였던가, 눈이 매우 적게 내렸었다. 겨울이 황량한 이미지로 남았던 해가 있는데 그 이후로 약간 걱정이 들었다. 만약 이러다 겨울이 되어도 영영 눈이 안 오면 어쩌지? 그러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을 보면 뭔가 지구가 잘 버텼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셋째로, 희귀한 현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무지개를 보면 다들 "와! 무지개다!"를 외치는 것처럼, 사실 눈 내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있는 현상은 아니다. 인터넷에 '눈 내리는 일수', '적설일수' 등 검색해보면, 대략 1년에 7일 정도라고 나온다. 1년이 365일 이니 퍼센트로 따지면 1.9% 정도 되는 것이다. 인간은 희소성이 클수록 가치가 높다고 느끼기 때문에 희소한 현상인 눈 내리는 날이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뭐가 되었든, 이렇게 난 신났는데 같이 놀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쉽다.
p.s. 감정일기를 쓴다고 쓰고 있는데 갑자기 이과 논문 양식의 글이 되어버린 기분이다...ㅋㅋㅋ 아무래도 T가 F를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