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일, 놀랐고, 얼굴색은 변했을 것이다.
아연실색 | 명사
(1) 뜻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람.
(출처: 우리말샘)
지난주 화요일(12월 3일)은 참 아연실색했던 밤이었다. 그날 밤, 양치하고 TV 앞에 앉아 웹툰을 보다가 마침 유재석과 유연석이 하는 '틈만나면'이라는 예능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오, 이번엔 대전을 갔네. 예전에 카이스트로 실습 갔을 때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이러면서 휴대폰은 잠시 접고 집중하려던 찰나, 갑자기 뉴스 특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내일 눈 많이 온대? 얼마나 많이 와야 뉴스 특보를 하지? 아니, 생각해보니 눈이 많이 와서 특보를 내보내야 한다면 뉴스특보가 아니라 '기상'특보가 나올텐데... 하면서 봤다. 중년의 남성 앵커분께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계엄을~" 순간 아주 당황스러웠다. 이건 또 뭔 소리지. 재난문자 온 것도 없는데, 전쟁났어?
곧바로 카카오톡을 켜서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들 '?', '뭐임?' 하는 분위기였다. TV로는 실시간 담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듣다보니까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전쟁은 안 났다는 거고, 계엄령 선포 이유가 탄핵 시도 때문이라고? 납득은 안 되지만 계엄령이라는 용어의 위압감에 너무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수상하지 않게 다니고, 출근은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인터넷에 혹시 현 정부를 욕한 게 있나? 그런 것도 다 잡으려나? SNS를 안 해서 다행이다... 만약에 환자가 많이 발생하면 어쩌지? 경험은 없지만 면허는 있으니 병원으로 가서 일 시켜달라고 해야하나?
그러다가 깨달은 사실: 다음날 아침에 화상회의가 있다. 맨정신으로 회의를 하려면 자야 한다.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카톡은 쉴새없이 쏟아졌다. 포고령이 발표된 직후, 모든 카톡방이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작년까진 학생이었고, 면허를 딴 이후 병원으로 출근한 적이 없으며, 여름부터 의과대학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면 대체 어디로 복귀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처단당하는 것일까? 내 본업은 현재 연구인데, 연구실로 출근하면 봐 주는 것인가?
대충 다음날 회의할 때 교수님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누워있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뛰어서 워치로 심박수를 쟀다. 114. 이게 누워있는 사람의 심박수인가, 당황했지만 최대한 평온하게 명상을 해보려다가... 실패했다. 왜 하필 이런 난세에 태어난건지, 우울해졌다. 나는 어릴 때 내가 열심히 하면 뭐든 잘 될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꿈을 약간씩 변형해갔지만, 궁극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줄 알았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경험상 그런 사람들은 정확한 상황을 말해준다 한들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렇게까지 휘둘리는 꿈이었다니, 짜증이 났다.
아연실색, '뜻밖의 일에 몹시 놀라 낯빛이 변함'이라고 한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고, 정말 놀랬다. 낯빛이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박수가 올라가면 낯빛은 변하게 되어있으니 (비접촉 심박수 측정의 원리를 검색해보세요) 아마 얼굴색이 변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아연실색한 날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연실색한 날은 그 날만이 아니긴 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 같기도...?
p.s.1. 잠을 못 자서 다음날 머리가 매우 아팠지만 회의는 잘 끝났다.
p.s.2. 요즘은 꿈이 없는 자가 부럽다. 그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빨리 맞춰서 행동할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에효, 코딩 에러나 고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