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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일기] 덤덤했던 친구들 모임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는

by 미레티아

덤덤하다 | 형용사

(1) 평소와 같이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이 그저 예사롭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덤덤한 모양이었다.

(출처: 우리말샘)


고등학교 시절, 거의 10명이 들어있던 카톡방이 있었다.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내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흐르고 유학을 간 친구들도 많아 만나는 날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방학이 되면, 연말이 되면, 명절이 되면, 어쨌든 정기적으로 모인다.


연말을 맞이하여 이번에도 모였다. 유학 간 친구들은 빼고 6명이 모였는데, 약간 오랜만에 봐도 너무 익숙한 친구들이고 어릴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특별한 감정변화는 없다. "이야~ 오랜만이네" 정도의 감탄사는 1~2초면 끝나고 "야, 뭐 시켜? 많이 시켜서 나눠먹자"로 금방 넘어간다. 근황 보고를 해도 뭐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그 다음에는 급격히 말이 없어진다. 무슨 주제로 대화를 꺼내지? 약간 너무 자주 만나고 익숙한 사람들은 서로 만나서 앞에 있더라도 각자 휴대폰을 보는 경우가 많듯이 이 친구들을 만나도 비슷한 감정이 든다.


그렇지만 한 번 대화가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다. 올해는 AI와 법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인터넷 데이터를 크롤링해서 학습에 사용을 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면 크롤링된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즉, 블로거 등)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가? 지불하는 게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냐, 블로그 글은 그렇다 치고 법률정보나 전문가의 글 등은 어떻게 해야하냐... 요즘은 내 데이터를 AI 학습에 사용하지 말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요청해서 거절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디폴트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되야하는 것이 아니냐... 개발자는 개발자 입장에서, 하는 친구는 법적인 입장에서, 나는... 블로거입장... ㅋㅋㅋㅋ


완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당연히 결론나는 것은 없고, 그 다음에 진지했던 것은 소설 이야기였다. 다들 과학을 베이스로 하는 친구들이니 SF 계열 작품을 즐기는 방향이 다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허무맹랑해도 소설이니까~하고 넘어가고, 또 어떤 친구는 안돼. 절대 안 돼. 안 봐. 이런 친구도 있고. 서로 최근에 읽은 소설을 추천하였는데 정말 우리 취향은 투명하구나, 싶을 정도로 친구와 그 친구가 추천하는 소설이 매치가 잘 되었다.


집에 와서 가족이 오늘 모임 어땠어? 라고 물어보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주장도 있었고 저러한 주장도 있었어~ 오늘 너무 앉아서 수다떨었다고 다음엔 걸어다니면서 수다떨쟤"라고 말하니 다들 너네는 참 건전하구나, 라고 이야기를 했다. 연애 이야기도 안 하고, 정치 이야기도 격하게 하지는 않고, 미래에 대해 하소연하지 않고, 맛집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연예인 이야기도 안 하고. 12시반부터 8시반까지 수다를 떨었는데 서로에 대해 더 깨달은 사실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를 다시금 느끼고 배운 시간이었다.


덤덤하다,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고 예사로운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친구들을 만날 때는 참 덤덤하다. 다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날 때는 반갑고 신기하고 막 두근두근대는데 얘네들은 늘 한결같이 순수하고 맑은 호기심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 같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만났지만 아주 덤덤했던 모임이었다.


p.s. 친구들 말에 따르면 내가 제일 고등학교 때와 똑같다고 한다. 아닌뒙 난 많이 달라졌는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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