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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Mar 10. 2019

지중해 철학 기행 3

 

“많이 읽고 많이 만난다.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독서가 가장 쉬운 방법이다. 미래는 반복되지 않지만, 역사를 알수록 예측은 쉬워진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찾아가고, 많이 만나도록 합시다.    


잠시 접어두었었던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읽은 내용은 기독교가 확립되어 가는 초기 과정입니다. 기독교 사상의 토대가 된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주제를 다루었는데 결국 그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일치하고 있어 정신을 모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철학적으로 규정짓고 개념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니다. 좀 더 집중해서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만 퇴근하렵니다.  

  

2007 10.5       산비



“인간은 파토스(격정: 어떤 즐거움에 대한 기대감, 달성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 솟아오르는 야망, 부정에 대한 분노, 위험에 대한 공포)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내맡기게 된다. 결국 자유로운 능동성을 자신이 겪고 있는 격정의 수동성에 복종시킨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삶 전체는 고통이요, 격정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자신의 내면을 잘 다스려서 지속적으로 행복하자면,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같이 ‘파토스’를 이겨내는 것, 곧 ‘아파테이아’가 행복에 이르는 스토아적 길이다.”    


이론적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도달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격정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갑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혹사시켜 정신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한편으로는 성공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실패입니다. 우선 당장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 여파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이 명랑하고 생기발랄해야 할 텐데, 몸의 피로는 다시 정신의 피폐를 가져옵니다.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태도만이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매진하면서도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2007 10.8      산비      


  

어제부터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화두는 욕망을 줄인다는 것과 꿈을 크게 가지라는 것은 배치되는 것인가?입니다. 꿈과 욕망은 다른가요? 어떻게 다른가요? 뭔가를 이루고자 목적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욕망 아닌가요? 그러면 우리는 꿈을 크게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이루고자 목적하는 바가 없으면 성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취가 없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현인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 치열한 일상의 보람에 의미를 두고 그것들을 오롯이 즐겨야 합니다. 욕망은 좌절을 낳고, 번뇌를 가져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욕망은 정신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꿈은 크게 가지되 다 얻고자 욕망하지 말고, 그 꿈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에 탐닉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2007 10.10     산비      


  

오늘은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플라톤주의가 어떤 식으로 접목되었는지를 공부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부활 사상이나 삼위일체론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기저 원리를 플라톤 사상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플라톤으로 통한다.’는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호모이오시스 테오’는 ‘신과의 동화’, ‘신을 닮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플라톤이 기본 개념을 제공하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완성한 개념입니다.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에 나오는 ‘아토스산’의 수도원 이야기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런 것이 책에서 얻는 희열이고 보람입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기점으로 르네상스로 넘어왔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르네상스 정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이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us)’입니다.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신 안의 의지가 질서 사유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 변화를 가리켜 ‘주의주의’라고 합니다. 헬트는 이것이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정신적 길을 닦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고와 행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발달시킬 끝없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신의 전능함이 무한히 전개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인간됨의 특징입니다. 짐승은 자연이 미리 확정한 행동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자기 확정에 있어 열려있다는 점이 인간 존엄성의 핵심을 이룹니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를 읽고 책을 덮었습니다. 책의 분량이 방대하기는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개념을 정리해나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정독해서 책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교양인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2007 10.11   산비        



“영화가 빛을 통해서 어둠을 만들어내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영화가 드라마틱한 서사의 시각적 재현이라는 생각을 괄호 안에 넣고, 빛과 어둠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빚어내는 이미지의 운동성에 마음을 내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감각들이 살아서 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 김동식    


빛을 통해서 어둠을 만들어낸다는 표현이 참 멋있습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는 것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일컫는 개념은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것입니다. 즉 예술가라고 부르는 특별한 소질을 가진 사람이 일상에서 끄집어낸 생산물을 우리는 예술작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인 것을 다 예술(라틴어: 아르스, 이탈리아어: 아르테, 독일어: 쿤스트)이라고 불렀습니다. 곧 아르스를 행하는 자가 신발공이든, 미장이든, 유리세공업자든 다 ‘아르티펙스’였습니다. 그러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서히 오늘날의 의미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아르티스타’ 즉 ‘아티스트 artist’라고 부르게 됩니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거의 완벽한 중앙 원근법이 완성됩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수학적 비례관계를 고려하는 데 각별한 가치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선행해서 미리 원근법적 공간의 계획을 미리 제도하고 스케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초안 설계도를 ‘디세뇨 disegno’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디자인’의 어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중앙 소실점, 즉 관찰자의 시점입니다. 내가 서있는 지점, 내가 바라본 관점. 이것이 창조적인 예술가와 단순 수공업적 장인을 구별되게 하는 포인트입니다. 창조적 예술가는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개인적 주관성과 천재성을 바탕으로 시점의 구성을 통해 조형예술을 완성합니다. 그것을 보는 우리는 시선의 유희에 감동적으로 얽혀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2007 10.12    산비        



오늘은 마키아벨리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로마(르네상스 사유의 깊이 -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편을 조금 읽었습니다.    


인간이 주목받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중세의 인간은 신의 모상이기 때문에 신과 비슷한 무한한 전개 가능성을 갖습니다. 신의 전능한 의지가 경계 없이 무한한 것과 유사하게, 인간 역시 어떤 식으로는 무한한 의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오성(悟性, 개념의 형성과 판단에 소요되는 마음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이렇게 인간 소유욕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이 모든 질서를 망가뜨립니다. 인간의 이런 상태를 마키아벨리는 ‘암비지오네ambizione’ (야망 혹은 야심)라고 부릅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의지를 신과 유사하게 무한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암비지오네’가 우리 인간이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로 보았습니다. 그는 치명적인 질병과도 같은 이 ‘암비지오네’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극단적인 치료법만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프린치페’. 곧 제약을 받지 않는 권력자의 절대적 지배입니다.     


잘 모르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2007 10.12     산비          



“독서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행위이다.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다. 청소년기에 이런 노동을 거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 귄터 그라스    


독서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생각입니다. 독서는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전력을 다하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행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뇌의 회백질에 깊이 각인시켜야 합니다. 나중에 잘 output 할 수 있도록 기억의 구획을 나누고 정리를 잘해두어야 합니다. 하나를 읽고 둘 이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 삶에 실천적으로 응용되어야 합니다. 독서를 제대로 하려면 여간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독서를 하도록 노력합시다.    


“서양철학의 역사가 결국 플라톤 철학에 각주를 다는 일이다.” - 화이트 헤드

“플라톤이 곧 철학이고 철학은 플라톤이다.” - 에머슨

“플라톤은 철학이라는 건물에 들어가는 현관이다.” - 나토르프    


이 책의 원 제목은 ‘트렙푼크트 플라톤’입니다. ‘트렙푼크트’는 ‘만나는 곳, 모이는 곳’을 뜻합니다. 즉 ‘모든 철학이 플라톤에게서 만난다.’ 혹은 ‘모든 철학이 플라톤으로 통한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책의 곳곳에서 플라톤을 만날 수 습니다. 서양 철학의 근저에 플라톤이 기초를 닦아놓은, 혹은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완성된 개념들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 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6세기에 이르는 고대 그리고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철학을 현장을 여행하며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을 마침내 끝냈습니다. 678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을 드디어 완독 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무게가 있는 책이었던 만큼 완독의 기쁨도 니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나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검증을 거친 고전들을 읽어보면 ‘역시 고전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런 책을 고르는 안목은 프로네 님이 더 뛰어나시니 앞으로도 좋은 책을 잘 골라서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중권 님의 ‘미학 오디세이’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어서 읽고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조금 게을러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새벽 시간을 활용한 독서생활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2007 10.17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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