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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Mar 09. 2019

함부로 열어 보지 말아야 할 것들


“지금 안 보는 책들을 선뜻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언젠가 내가 좀 더 한가해질 때면 볼지 모른다는 기분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삶에서 지금 못하는 것은 대부분 나중에도 못 합니다. ‘내일 내일’ 하다가 종말이 오는 것이지요.” - 최보식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지금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현실 삶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을 다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은 늘 고통스럽고 번잡합니다. 한 가지 방법은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배고픔이나 목마름은 필연적 욕구입니다. 빵에 버터와 잼을 바르는 것은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욕구에 굴복하는 일을 점차 줄이고,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구는 완전히 단념하라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권유합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헤도네’입니다. 헤도네는 ‘즐거움’이고 ‘달콤함’입니다. 에피쿠로스적 현자는 관념론적인 덕에 얽매이지 않고 헤도네의 순간, 삶의 달콤함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분별하게 쾌락이나 향락에 이끌려 사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 순수한 헤도네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아쉬워할 것이 없는 상태(아우타르케이아: 자족)의 행복, 바다처럼 고요한 상태의 영혼이 진정한 헤도네입니다. 헤도네를 누리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됩시다.    


“삶에는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삶이라는 건 내 형편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 윤대녕    


살다 보면 나 스스로는 풀기 버거운 문제들과 맞닥트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운명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나에게 와 부딪치고 달아납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삶은 그냥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울고만 있을 수도 없고, 힘들다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정처 없이 흘러가기보다는, 허겁지겁 뛰어가는 군중에 묻혀 덩달아 정신없이 달려가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사위를 살피고 마음의 갈피를 잡은 후 담담하고 당당하게 뚜벅뚜벅 내가 정한 길로 걸어갈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007 9.29       산비  


     

“시는 내게 떠나라 하고, 여행은 내게 시를 쓰라 한다. 사는 게 온통 경계를 긋고 영역과 몫을 나누는 일에 지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경계를 긋는 일에 하루하루를 골몰해 살고 있는 탓일까? 구름이나 물처럼 ‘흘러가는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사람들을 볼 때면 무작정 따라나서고 싶어 진다.”    


정끝별 님의 책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를 완독 하였습니다. <정끝별 여행 산문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시인이기도 한 저자가 시 속에 나오는 여행지들을 찾아다니며  시와 시인들을 소개하고 그곳에서 보고 느낀 감회를 일기 쓰듯 적어나간 에세이입니다.    


잔잔하고 소박한 소회들이 정감 있게 다가오지만 구어식의 문체들이 오히려 글 읽기를 방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과유불급이지요. ‘구어체는 담백하고 건조한 글 사이사이에 잠깐씩만 들어가는 것이 더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빌려 드릴 테니 한 번 가볍게 읽어보십시오. 한 번에 쭉 읽지 마시고, 14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자투리 시간이 날 때 머리를 식힐 겸 틈틈이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10월의 첫날입니다. 바야흐로 계절은 시간의 흐름에 편승해 흘러만 갑니다.    

    

2007 10.1        산비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까지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체념한 듯 조용히 헤엄치던 수족관의 물고기에게도 아주 가끔 온몸을 비틀어 파닥거리며 위로 뛰어오르는 짧은 순간이 있다.” - 은희경    


살아가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그대로 일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무언가를 꿈꾸고 계획하고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참된 삶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 주변 여건이 아무리 나를 옭아매고 옥죄어도 온몸을 비틀어 용을 쓰면 짧은 순간이나마 물 위로 뛰어오를 수가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이것을 보았을 때, 나는 바람 부는 밀레투스 유적에 서서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하고 되뇌던 때를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유적들을 보며 떠올린 단상입니다. 아마 프로네 님이 느꼈던 그 감정과 마찬가지 심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적은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난 뒤의 역사의 현장은 얼마나 황량하고 허무한 곳일지...    


2007 10.4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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