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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cus Dec 21. 2018

보여주기 : 영화가 기억에 남기 위한 방법

A Lesson In Visual-telling #4

A Lesson In Visual-telling #2

※ <설국열차>(2013), <저수지의 개들>(1992)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주인의 장벽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정지용의 <인동차>입니다. 많은 분이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과정에 있던 시였거든요.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수업시간에 이 시를 읽었던 게 기억납니다. 아마 처음으로 시를 읽었던 것 같아요. 진짜로 '읽는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시를 진짜로 읽는다는 건 그냥 중얼중얼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 안의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면서 읽는 것을 말하겠죠. 당시 저는 이 시에 완전히 꽂혀서 수업도 듣지 않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마치 제가 노인이 된 것처럼 말이죠. 겨울 산중에 창밖으로 눈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노인. 그 노인의 마음을 상상하면서요.


저를 노인의 마음으로 단박에 이끈 건 시의 첫 문장이었습니다. 노주인의 장벽에 인동 삼긴 물이 나린다. 이 문장에 그냥 넉다운이 되었어요. 뜨거운 차가 위벽을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을 다들 아실 텐데요. 저는 이런 사소한 일상의 감각들로도 시로 쓸 수 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그때는 시, 하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대단한 예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실제로 느낀 감각을 표현한 시가 있네? 저는 이 시를 너무나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인동차>는 위벽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차의 느낌으로 저에게 남았습니다. 아직도 차를 마실 때면 이 시가 종종 생각나고 그러니까요.



차를 마신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저에게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위벽에 차가 나린다는 표현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도록 이야기하고 싶다면 <인동차>의 첫 문장처럼 이야기하면 된다, 라고 말입니다. 차를 마신다고 말하지 않고 위벽에 차가 나린다고 말하는 것이죠. 듣는 사람의 감각을 자극하기. 생생하게 보여주기. 사람들의 기억에 남도록 말하는 방법입니다.


설명(tell)하지 말고 보여(show)줘라. 실제로 많은 작법서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이건 문학에서의 경우입니다. 영화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어떤 영화가 보여주는 영화고 어떤 영화가 그렇지 않나요? 보여주지 않고 설명하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1992). 두 가지 예시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설국열차>는 눈으로 뒤덮인 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차 안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기차는 윌포드라는 인물이 만든 무한한 엔진으로 운행합니다. 눈 덮인 세계를 질주하는 기차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일반석인 꼬리 칸에, 부유한 사람들은 일등석인 머리 칸에 타고 있어요.


주인공 커티스는 기차의 혁명을 주도합니다. 동료를 모아 꼬리 칸에서 머리 칸으로 피의 행진을 이어가죠. 마침내 머리 칸에 도달한 커티스. 그곳엔 윌포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놀라운 말을 전합니다. 영화의 반전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사실은 혁명이 짜고 친 각본이었다는 것. 알고 보니 머리 칸의 윌포드와 꼬리 칸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은 오랜 동료. 혁명은 둘 사이에서 의도된 것이며 기차 내부의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권장되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와우. 갑자기 이렇게 방향을 틀다니요. 뜨거운 혁명을 말하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냉정한 자연을 말하는 영화였어요. 


영화의 주제와 색깔을 바꿔버리는 이토록 중요한 변곡점.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어째선지 윌포드의 대사로 모든 상황을 설명합니다. 폭주하는 기차처럼 맹진하던 커티스는 윌포드의 말 앞에서 맥없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이런 급제동은 당황스럽습니다. 이야기의 온도가 단번에 식어버려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한 인물이 짧은 대사로 모두 설명할 때, 열심히 퍼즐을 맞추던 관객은 망연자실해집니다. 마지막 퍼즐을 관객이 아닌 윌포드가 맞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설명하기(telling)의 문제점은 관객을 참여시키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관객이 참여하지 않으니 감각이 자극되지 않고, 감각이 반응하지 않으니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습니다. 위벽에 차가 나린다고 말하면 언젠가 뜨거운 차를 마셨던 경험과 감각이 재생됩니다. 그러나 차를 마신다고 말하면 그저 일반적인 정보가 전달될 뿐입니다. 윌포드는 모든 전사를 설명(tell)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관객이 영화에 참여할 여지를 없애고 있습니다. 


생화와 조화는 보기만 해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조화도 생의 기운까지 모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showing)란 그런 겁니다. 생의 기운을 전달하는 것. 사람들은 시를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직관적으로 생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생생하려면 보여주어야 하고, 보여주려면 관객의 감각을 자극해야 합니다. 관객이 직접 머리를 쓰게 만들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동선과 대사를 통해서 관객이 추론하며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반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은 생생하게 보여주는(show) 영화입니다. 관객을 꼼짝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예요. 그래서 <저수지의 개들>의 무척 뛰어난 몇몇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관을 나오고 나서부터 시작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라는 말인 것 같아요. 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나요? 내가 본 것이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도무지 잊혀지지 않고 계속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미스터 오렌지는 비밀경찰입니다. 그는 범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위장 잠입합니다. 어떻게 경찰이었던 오렌지가 범죄자로 완벽히 위장할 수 있었는지, 이제 타란티노 감독은 긴 설명을 해야 합니다. 쉽게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타란티노는 아주 멋진 씬을 만들어냅니다.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 탁월한 장면을 만들어내죠.



오렌지는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관객은 이게 뭔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관객은 스스로 추리해야 합니다. 어떤 여자? 마리화나?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런데 사실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얼마나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전달하는지가 중요하죠. 오렌지는 다른 범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 일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제스처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관객의 신뢰를 받기 위해 영화를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마침내 오렌지는 생생하게 들릴만한 결정적인 일화를 들려줍니다. 배달을 부탁한 마리화나를 들고 오렌지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그는 거기서 경찰과 경찰견을 마주칩니다. 이때 타란티노 감독은 단순히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직접 화장실을 보여줍니다. 슬슬 관객의 감각이 자극되기 시작합니다. 네 명의 경찰과 경찰견이 서 있는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정말로 경찰들을 보여줍니다. 개가 바로 날 보고 짖는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개가 짖는 장면을 리얼하게 보여주죠. 경찰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카메라가 회전하면 네 명의 경찰들은 오렌지를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고 있습니다.


경찰과 개, 마약을 유통하는 오렌지. 오렌지는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마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떠들어 댑니다. 재밌는 것은 그 상황에서 네 명의 경찰이 오렌지를 지켜보고 있는 구도입니다. 경찰들 코앞에서 마약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죠. 이런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자극적입니다. 이것이 보여주기입니다.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는 방법이죠. 긴장은 점차 고조됩니다. 관객은 오렌지가 들킬 것 같아 조마조마합니다. 마침 경찰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소리칩니다.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 전에 손 올려!" 재치있는 대사입니다. 오렌지를 향하는 대사처럼 쓰여졌군요. 덕분에 긴장의 끈은 더 팽팽해집니다. 이어서 오렌지는 핸드 드라이어를 켭니다. 날카로운 소음이 들립니다. 여기서 관객을 때리는 스트레이트. 소음이 굉음이 됩니다. 시끄러운 굉음이 관객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죠. 그리고 오렌지의 뒤통수로 날아와 꽂히는 경찰의 비장한 시선. 관객은 이 순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한껏 긴장된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오렌지는 퇴장. 소음은 흩어지고 긴장이 풀어집니다. 경찰은 마저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치 이 정도 영화적 테크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음 장면으로 쿨하게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감각을 자극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법이에요. 펄떡이는 창의력과 생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면이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 열광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은 바로 저런 장면들입니다. 보여주는 장면들. 그래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장면들. 살아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장면들.


시인은 시어를 발굴합니다. 죽은 일상의 단어들 사이에서 생경하고 독특한 질감의 시어를 찾아 헤매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영화에는 감각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창의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장면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기억에 더 오래 남기 위함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감히 말하건대, 모든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시를 굳이 왜 쓰나요. 영화를 굳이 왜 만들까요. 물론 만들고 싶어서 만듭니다. 그런데 만들고 싶다, 라는 마음은 표현의 욕구입니다.


누구에게 표현하나요? 당연히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합니다. 내 생각이나 취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우리는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의 한 구절입니다. 조금 바꿔 말할 수도 있어요.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면 내 존재는 꽃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하면 그 영화는 예술이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와서도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좋은 영화입니다.


고고하고 사색적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것이 예술 영화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뒤흔들고 그 순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가 예술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와서도 어떤 장면이 계속 기억나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지는 영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이것이 예술 영화입니다. 그리고 보여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예술을 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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