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 나라의 주식은 다르다. 한국은 밥을 주식으로 한다. 내가 잠시 있어보았던 케냐,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아프리카 기후의 국가는 하얀 전분 작물 음식인 카사바를 으깬 것을 주식으로 한다. 어느 나라든 보통 에너지 공급을 위해 탄수화물로 만들어지고 쉽게 찾아 먹을 수 있는 것이 식사에 빠지지 않는 주식이 된다. 주식은 무난하고 곁들이 음식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주식은 그 나라에서 해 먹는 어떤 음식 메뉴와도 어울리기에 마치 패션에서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는 청바지 같은 역할을 한다. 서구식 음식 문화가 있는 국가에서는 밀가루를 주 재료로 만드는 빵이 주식이다. 서구식 음식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 ‘어떤 빵’을 ‘어떻게’ ‘어떤 부재료’와 만드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빵의 이름’이 달라질 뿐이다.
잘 만든 바게트는 겉이 바삭하며 먹기위해 자를 때 소리가 나야 한다. 속은 부드럽고 쫄깃하다. 바게트는 약 이틀 정도 두고 먹는데 이 기간이 지나면 속까지 딱딱해진다.
프랑스에서는 밀가루, 소금, 물로 만드는 바게트가 기본 주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보통 빵은 공기와 접촉하고 최소 하루가 지나면 최고의 맛을 상실한다. 하루가 다 한 빵은 빵집의 매장 진열대에서도 사라진다. 빵은 그날 사서 그날 먹는 신선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기에 빵은 한국의 밥, 죽, 누룽지 문화처럼 다양한 변용을 가해 먹기에 어울리지 않고, 마른 빵은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간 프랑스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프랑스인들이 빵을 버리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프랑스인들이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은 바게트를 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쓴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오래 전 시부모님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모두가 음식을 다 먹고 커피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뚜벅뚜벅 자리에서 일어나신 시아버지가 어둡고 오래된 나무 찬장 속을 열어젖혀 차와 커피류를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어떤 차를 마실 것인지를 물어보는 순간이었다.
내 눈에 커피나 차 티백보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이 있었다. 찬장 한 쪽에 한눈에 보아도 오래된 바게트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내가 궁금해하며 여쭤보자 저렇게 마른 바게트를 모았다가 당나귀에게 간식으로 주신다고 하셨다. 시아버지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집에서 전원 생활을 하면서 당나귀를 키우시는데 덕분에 바싹 마른 바게트는 동물의 차지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어쨌든 마른 바게트를 모아둔다는 행위 자체를 기존에 상상하지 못했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는 매우 신기했다. 그리고 이 일화에서는 시아버지가 전원 생활을 한다는 특수성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노르망디 시부모님 집에 사는 당나귀 올가, 바게트를 간식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이후 프랑스인 지인들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에도 역시 기간이 된 빵을 모아두거나, 얼려 보관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다 먹지 못해 마른 바게트와 빵을 버리려고 하자, 그걸 본 남편이 내게 ‘빵은 버리는 게 아니라며’ 부엌으로 달려와 바게트를 사수하였다. 그리곤 그 빵으로 조만간 음식을 만들어 보여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알고보니 버리지 않은 바게트는 음식으로서도 재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며칠이 지난 빵을 이용하는 요리 레시피가 꽤 많이 있다. 이를 통칭하는 ‘빵 페르뒤(Pain perdu)’라는 이름이 있다. 이는 ‘잃어버린 빵’이라는 뜻으로, 최상의 맛일 때 먹지 못한 남은 빵을 재사용하는 레시피를 말한다. 빵 페르뒤는 어떤 특정한 한 음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가정집마다 각기 자기만의 비법으로 만드는 빵 페르뒤 레시피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날 내가 버리지 못한 빵으로 남편이 해준 요리도 그가 가지고 있던 레시피로 만든 빵 페르뒤와 빵 푸딩이었다.
이후로 우리 집에서 해먹는 빵 페르뒤의 기본 레시피는 마른 바게트나 브리오쉬, 식빵 등을 우유에 적시고 달걀물에 담갔다가 후라이팬에 굽거나 오븐에 굽는 것이다. 여기에 초콜렛이나 다른 부재료를 더해서 오븐에 구우면 빵 푸딩이 되기도 한다. 어딘지 익숙한 레시피 아닌가?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프렌치 토스트의 레시피와 유사하다. 프렌치 토스트는 사실은 하루 이틀 지난 식빵으로 만들어먹는 빵 페르뒤의 일종이다.
이외에도 각종 수프에 넣어 먹는 작은 사각형 모양의 빵조각인 크루통이 대표적으로 유명한 빵 재사용 레시피다. 치즈를 녹인 음식인 퐁듀에 적셔먹는 빵도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마른 빵이어야 퐁듀에 담가 먹을 때 가장 맛있다. 겨울에 생각나는 고소하고 향긋한 프렌치 어니언 수프에도 조금 마른 빵을 적셔 먹으면 좋다. 이는 모두 시간이 조금 지난 마른 빵을 활용하고자 하는 프랑스인들의 빵 사랑에서 출발한 레시피였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라상 샌드위치도 사실은 프랑스에서는 하루가 지난 크라상을 활용하기 위해 안에 부재료를 넣어서 팔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프랑스 최고의 빵집을 찾아라>라는 음식 티비 프로그램에 나온 한 여성 지원자가 빵 페르뒤 레시피로 도전을 하는 것을 보고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빵 페르뒤를 어떻게 잘해먹는가도 역시 프랑스인들의 관심사이다. 그 나라의 주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에서는 그것을 활용한 레시피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주식인 음식을 버리는 것은 매우 신성하지 못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부식 반찬이 쉬어서 버려도 아까운 건 매한가지이지만, 주식인 밥을 버리게 될 때면 왠지 모르게 더욱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물며 프랑스인에게 빵이란. 한국의 밥, 떡, 볶음밥, 죽, 누룽지, 누룽밥... 그리고 프랑스의 빵 페르뒤, 프렌치 토스트, 크루통까지... 음식의 주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나라든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나도 바게트와 같은 빵을 버리지 않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에서도 주식인 밥을 먹기 위한 쌀 소비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슷하게 프랑스에서도 젊은 층은 과거의 프랑스인들에 비해 빵을 덜 먹는다고 한다. 이전에 비해 주식인 밥이나 빵에만 의존하는 상차림을 떠나 외국의 식문화가 유입되고 외국의 음식들이 인기를 끌면서 고유의 주 음식은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과연 프랑스에서는 빵이 여전히 주식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한국의 쌀 소비량이 줄었다고 한국사람에게 쌀과 밥이 주식이 아닌 것은 아니듯, 프랑스에서도 젊은 층이 빵 이외의 다른 음식을 많이 먹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빵과 바게트가 주식이 아니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