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멩이 Apr 15. 2020

친절하고 나쁜 사람

윤흥길, 황혼의 집

 전에 일했던 카페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상냥했고 친절하다. 음료를 가져갈 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주문이 밀려도 불평하지 않는다. 서로 부딪히면 먼저 사과한다. 그곳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밖에 없다. 불쾌하고 불편한 사람, 예를 들면 경주 같은 사람은 없다.

 소설 속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무턱대고 할퀴려는 경주에게 ‘나’는 설명한다.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며, 정당한 값을 치르고 집을 샀다.” 맞는 말이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 부당한 방법으로 경주네를 내쫓은 것은 오래전 일이고, 주인도 여러 번 바뀌었다. ‘나’는 경주네에 직접적인 연관과 책임이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나’의 어머니는 상냥한 마음으로 경주네 어머니에게 떡과 밥을 보내주기도 한다.

 어느 오후에, 경주와 ‘나’는 개미를 태워 죽이는 장난을 한다. ‘나’는 새로운 장난에 끼여들기를 처음엔 무척 꺼렸다. 그러나 “어느덧 나는 공범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같이 개미를 죽이며 경주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주가 “죽여 버려야지”라고 말하며 집으로 뛰어갈 때, 그녀가 개미를 죽였던 것처럼 어머니를 죽일 거라 생각하고 넥타이를 주려한다. 그러나 오히려 경주는 ‘나’를 죽일 작정으로 화를 낸다. ‘나’는 “나의 공범 의식 속에는 뭔가 분명히 잘못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경주는 동등한 공범자가 아니다. ‘나’에게 개미 죽이기 놀이는 단순한 놀이다. 그러나 경주에게는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끔찍한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한, 그 생각을 놀이로서 승화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다. 경주가 개미 죽이기 놀이를 이러한 방식으로 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한국전쟁, 즉 국가나 사회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책임은 없을까. 없다면 왜 ‘나’는 경주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금니가 시릴까.

 나쁜 일은 의식 중에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로 나쁜 일은 자신도 모르게 버릇처럼 일어난다. 가령 아낙네들이 걸신들린 어린 아이 앞에 송편을 미끼로 던지고, 그 대가로 집안의 비밀을 받아낼 때 일어난다. 아낙네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서로 좋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경주를 떼어내 집안에 데려와서 “매우 장한 처사”라는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낙네들은 경주네가 죽은 이후로 경주네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친절한 사람들의 친절한 행동이지만, 정말 나쁜 일은 벌어졌다.

 그들의 친절함은 경주네의 고통을 보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가까운 사람의 고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고통을 보려면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주네를 향한 마을사람들의 연민과 호의는 경주네와의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사실 마을사람들도 연루되어있는) 한국전쟁이 경주네 고통의 원인이 되고, 마을사람들은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 경주네 어머니가 ‘나’를 아픈 경주의 머리맡에 주저앉힌 것은,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보라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공범 의식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후, ‘나’는 경주네 어머니의 울음을 듣고 “어금니가 시려서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귀를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왼쪽 충치를 뽑아서 지붕 위에 버렸다. 충치는 빠졌고, 새로운 이빨이 날 것이며, 황혼의 집은 사라졌고, 새로운 새댁이 이사 왔다. ‘나쁜’ 것을 모두 제거한 친절한 사람들은 평화로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윤리는 '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