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다양한 연대를 경험한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경험을 하며, 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타인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근간이니까. 하지만 타인을 향한 ‘환대’를 강조하다 보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 칼을 들고 다가오는 침입자에게도 환대를 베풀어야 할까? 논리적으로 보자면 베풀어야 할 것 같다. 환대라는 개념엔 ‘선별한 타인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없으니까. 조건적인 환대는 환대가 아니라 ‘친절’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런 딜레마는 위대한 철학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찾아왔다.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묻는다.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가정이나 지배력을 빼앗는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조건이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이라는 책에서 환대의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그는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우리는 ‘절대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애매모호한 결말로 마무리한다.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대사상의 최전선에 있는 철학자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순 없으니.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데리다의 딜레마에 유의미한 돌파구를 제시하는 책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최고의 서양철학자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서, 한국의 철학자가 그 실마리를 제시한 것이다. 한국의 학문 연구는 그동안 주로 서양 사상가의 이론을 한국의 현실이나 텍스트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신 서양이론을 가져오므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움’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기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서양이론을 그저 따라가기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현경은 푸코나 데리다 등 대부분의 연구자가 그대로 받아들인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구성해냈다. 연구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드물었던, 한국 연구의 소중한 성과다.
김현경은 ‘사회’를 도입함으로써 데리다의 딜레마를 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물론 살인자가 다른 사회구성원과 동등하게 환대되진 않는다. 그의 자유와 행동은 제한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이다. 법의 적용을 받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시민 자격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김현경이 말하는 ‘절대적 환대’다.
가끔 연쇄살인자를 지목하며 사형제도를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생명을 죽인 사람에게는 생명을 유지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정적인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다. 사형제도가 다시 되살아났다고 해보자. 그런데 사형을 적용할 죄목,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는 행동’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과실에 의한 살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방관과 방조에 의한 살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모두 사형을 적용해야 할까? 애매모호한 기준은 결국 사회적 약자를 향할 것이다. 과거처럼 피부색이나 성별, 계급이 ‘열등’하다는 이유로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유겠지만) 사형당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사형은 누군가를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돌이킬 수 없는 행위다. 사회는 구성원을 추방함으로써 내부에 공포감을 형성한다. 사형이 사회구성원을 규율하는 효과를 낸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구성원들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자신을 숨기며 은밀한 적대감을 드러낼 뿐이다. 차라리 그 어떤 적대적 행위를 저지른 자라도 추방하지 않음으로써, ‘피부색이나 성별,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존중받는다’는 현대사회의 기본원칙을 유지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혁신적인 성과인 이 기본원칙은, 흑인·여성·빈민·난민 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며,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친절하지 않은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추방당해선 안 되며,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절대적 ‘환대’로써 ‘사람’답게 대접받는 ‘장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