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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May 25. 2020

전체 회의

19. 6. 25. 스반홀름 10일차(덴마크51일차)

함께 일한다는 건 자연스레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오늘은 전체회의가 있는 날이다. 쇠얀과 내가 스반홀름에 도착했을 때 휴가를 가 있던 게스트 담당이자 빌딩그룹 소속인 몬스Mogens와 카렌 마리가 돌아와 전체회의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몬스와 카렌 마리는 부부로 서른 살 된 아들 안드레아스Andreas와 함께 스반홀름에 살고 있다(안드레아스도 빌딩그룹에서 일한다). 




베지터블 그룹 헬퍼를 마치고 돌아와 방을 옮겼다. 우리가 일할 동안 카렌 마리가 우리가 옮길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었다. 새로 옮길 방은 훨씬 넓고 쾌적했다. 이번 방도 1인실이어서 카렌 마리는 곧 떠날 게스트 방(2인실)이 비면 다시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계속 짐을 옮기는 것도 지치고 무엇보다 아담한 사이즈의 방이 마음에 들어 그냥 여기에 쭉 머무르겠다고 했다. 문&유곤씨가 지내고 있는 2인실은 우리 방의 2배쯤 되는 훨씬 넓은 방이었는데 어쩐지 둘이 지내기엔 휑할 것 같아 여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방을 옮기고 짐까지 모두 풀고나자 이제야 좀 안정감이 들었다. 아직 삼쇠의 다락방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이 방도 금세 몸에 익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짧은 여행이라도 다양한 체험보단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숙소에 경비의 많은 비중을 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오래 머무를 곳의 분위기는 중요했다. 방에 있는 조명을 다 켜도 눈부시게 환하지 않은 반지하 실내가 아직 어색했지만 창문이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창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책상 배치까지 바꾸자 마음을 좀 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러룸 벽난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체 회의가 열리는 미러룸으로 향했다. 메인빌딩 2층에 자리한 미러룸은 마치 무도회가 열리던 중세 유럽 성의 파티룸처럼 근사했다. 한쪽에는 작은 벽난로가 있고 이름처럼 방 한가운데 붙은 거울이 방 전체를 담고 있었다. 우퍼는 나와 쇠얀, 문&유곤, 피에르와 닐스가 참석했다. 우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주민들 사이에 방석을 깔고 쏙쏙 껴 앉았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우리를 위해 잠시 영어로 진행됐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새로 온 게스트인 우리들의 소개가 간단하게 이어졌다. 서툰 영어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짧은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온화한 얼굴로 익숙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후 회의는 덴마크어로 진행되기에 덴마크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우퍼들은 구경만 조금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동그랗게 모여 앉은 서른 명가량의 주민들은 열띤 회의를 이어나갔다.


스반홀름에서는 한 달에 1-2번 정도 전체회의를 진행한다. 마을의 세세한 사항들 모두 전체회의를 통해 다 함께 결정한다. 회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평균적으로 2-30명 정도 참석한다. 한 가구당 제공되는 방 크기부터 마을 곳곳의 벤치 위치(메인 빌딩 앞에는 몇 개의 벤치를 놓을 것인지 등)까지 마을의 모든 부분을 합의를 끌어낼 때까지 회의를 통해 결정하므로 그 누구라도 의견을 낼 수 있고 또 대체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빌딩 그룹 사무실과 커피브레이크 모습



스반홀름은 주민들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전체회의 외에도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마을 살림을 이끄는 세 개의 팀을 주축으로 하나의 큰 기업처럼 공동체 운영을 위한 부서가 있고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한다. 마을 실무를 도맡는 주요 3팀은 ‘빌딩 그룹’, ‘베지터블 그룹’, ‘키친 그룹’이다. 자원봉사를 신청한 게스트(우퍼)들은 이 세 팀에 각각 배정된다. 나와 쇠얀, 문&유곤, 아나스는 빌딩 그룹, 피에르와 닐스, 시슬과 프란시는 베지터블 그룹, 케이티와 존은 키친 그룹에 속해 있다. 게스트들은 하나의 복도로 이어진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생활하지만 아무래도 팀별로 일을 나가다 보니 오가며 인사하는 정도 외에 친해질 기회가 적었다. 그래도 게스트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스몰키친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나와 쇠얀은 한국인인 문&유곤 커플 외에는 아무래도 같은 빌딩그룹인 아나스와 금세 가까워졌다. 함께 일한다는 건 자연스레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테이블 하나를 옮기더라도 박자를 맞추고 눈빛으로 수신호를 해야 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더라도 몸으로 함께 일하며 공동의 과제를 수행해내는 시간은 금세 타인과 깊숙이 소통하는 과정이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나스와는 종종 그런 순간을 나눴다.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작은 키친



회의장에서 나와 마을을 산책하다가 여분의 작업복으로 쓸 옷가지를 챙기러 쇠얀과 함께 세컨핸드샵으로 갔다. 덴마크는 세컨핸드샵이 일상화되어 있어서 작은 동네라도 세컨핸드샵이 하나씩은 꼭 있다. 물가가 비싼 이유도 있겠지만 멀쩡한 제품을 다시 쓰는 것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고 일반적이다. 스반홀름 마을에도 창고 하나를 세컨핸드샵으로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입지 않은 옷과 신발들을 가져다 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한다. 마을에 도착한 직후 문&유곤씨의 안내로 세컨핸드샵에서 우리는 작업복으로 입을 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각각 골랐는데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예쁘고 좋은 아이템들은 금세 사라진다고 했다. 그새 세컨핸드샵에는 며칠 전에는 못 봤던 옷가지들이 새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셔츠 한 벌과 신발을 새로 얻어서 신나게 돌아 나왔다. 누군가의 발에 맞춰 편안하게 늘어난 신발은 내 발에도 꼭 맞았다. 빳빳하고 날 선 새 신발보다 나와 비슷한 발 모양을 가진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신발은 어떤 안정감을 주었다. 그의 발 위에 내 발을 포개어 걷다 보면 나도 어느새 이곳을 내 집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하는 쾌청한 밤이었고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서는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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