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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02. 2020

오늘 하루 당신의 감사함은 무엇인가요?

19.  07. 04 스반홀름 19일차(덴마크60일차)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덴마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요하게 자기만의 우주를 펼쳐내고 있었다.





키친 그룹에서의 일과는 바쁘게 돌아간다. 9시 반에 출근하면 차를 만들기 위한 물을 끓이고 밤새 메인 키친을 이용한 사람들이 쌓아놓은 설거지를 해치운다. 10시 무렵이면 키친팀이 모여 회의를 시작한다. 그날그날 소진해야 할 재료를 체크하고 메뉴를 결정한다. 크게 일반식과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단, 두 가지로 구성하며 전체 진행을 지휘하는 최고 셰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동등한 요리사의 입장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누군가 “내가 오리엔탈식 커리를 만들게.”라고 하면 그 메뉴의 레시피와 진행은 그 담당자에게 일임한다. 그렇게 메뉴와 담당자가 결정되면 일손이 필요한 부분에 게스트가 배치된다. 메인 메뉴에 쓰일 채소 손질을 돕거나 샐러드, 오븐 구이 감자처럼 기본 베이스로 제공될 메뉴는 게스트가 맡는다. 설거지는 기본적인 게스트 업무지만 양이 많거나 시간 여유가 되는 키친팀 누구든지 설거지를 돕는다. 할 일이 정해지면 각자의 자리로 가서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최대한 차질 없이 요리를 완성한다. 샐러드처럼 차게 먹는 음식은 늦어도 30분 전까지 마무리하고 오븐 구이 감자처럼 뜨거운 요리는 딱 맞춰서 배식될 수 있게 준비한다. 점심시간은 정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다가온다.



점심시간이 되자 곳곳에 일을 나가 있던 마을 사람들과 게스트들이 한 데 모였다. 배식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땡큐” 했다. 모두 마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데도 언제나 식사를 준비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스반홀름에 도착한 첫날 낯설고 두려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공동 배식은 공동의 영역을 전문 집단에게 일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추가적인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시스템이었다. 새벽부터 밭일을 하는 킴을 위해 식당 손님을 맞기에도 바쁜 와중에 킴의 식사를 준비하던 스티니와 음식이 차고 넘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끼니는 챙기기 힘들었던 스티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각자 벌이를 하고 돌아온 집에서 또다시 가족들의 끼니를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수많은 한국의 가족들도. 더불어 수많은 집들마다 각기 소비했을 가스와 전기와 세제도 훨씬 절약될 터였다. 100개의 오븐을 돌리는 것보단 100인분이 들어가는 큰 오븐 하나를 돌리는 게 아무래도 나을 테니까. 


빌딩그룹에서 돌아온 쇠얀과 문&유곤씨 역시 식사를 준비하느라 고생했다며 내가 준비한 음식들을 가득 담아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들 역시 마을을 위해 땀을 흘리고 왔는데도 그 말을 듣자 새삼스레 내가 정말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인분의 감자를 다듬고 샐러드를 만들고 차를 끓이고 설거지하는 일이, 금전적인 대가는 하나도 없는 그 모든 과정이 그 어떤 노동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억울함을 남기지 않았다. 이들이 그 과정을 충분히 알아준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만화카페에서 손님들을 위해 라면을 끓이고 볶음밥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면서 양 손등이 습진으로 뒤덮여 가는 걸 보며 받은 시급 6,470원은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는데 종일 정신없이 100인분의 음식을 만들고 100인분의 설거지를 하는데도 다리가 퉁퉁 부었는데도 허무하지 않고 억울하지 않았다. 온몸 가득 어떤 충만감으로 벅차올랐다. 내가 손질해서 만든 샐러드 통이 싹 비워진 걸 보며 든든하게 배를 채운 저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 마을을 위해 몸을 쓰는 걸 보며 저 에너지를 바로 내 손으로 만든 것만 같았다. 




일과를 마친 저녁, 게스트들은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스몰 키친에 모였다. 아나스의 제안으로 우리는 함께 사는 이들과 정식으로 인사하는 자리를 갖기로 한 것이다. 일찍 도착한 아나스는 직접 따온 허브잎으로 차를 우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 앉은 열댓 명의 게스트들은 돌아가며 인사를 나눴다. 새로 온 우리와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아나스는 능숙한 MC처럼 진행을 시작했다. 모두 함께 3분간 생각한 뒤 지금 이 순간 가장 감사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아나스의 재치있는 제안에 다들 장난스레 키득키득 웃었지만 이내 모두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덴마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요하게 자기만의 우주를 펼쳐내고 있었다. 창 너머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밀려왔다. 쑥스러운 얼굴로 각자의 감사함을 이야기했다. 한 명 한 명의 감사함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모두 그 생각에 지지를 보내고 박수쳤다. 


그리고 나는 서툰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는 오늘 키친팀에서 일했어. 정말 많은 감자와 정말 많은 채소를 준비했지. 너무 힘들었어. 근데 키친팀 모두 엄청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면서 일하는 거야. 아주머니들이 막 힙합 같은 걸 들으면서. 그걸 보는데 나도 신나고 재밌게 일할 수 있었어. 나는 그게 너무 감사했어.”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 명 한 명의 감사함을 귀 기울여 들었다.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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