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모독
다수에게 비난을 받은 글과 소수에게 예찬을 받는 글과 소수에게 예찬을 받는 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조차 하지 않고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작가라는 꿈을 선택한지 어느덧 8년
"다들 소양이 부족해 내 글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
하고 스스로 예술병에 빠져 있기엔 8년이라는 투병기간은 왠만한 병들을 완치하고도 남을 충분한 기간이다.
과거, 아니 과거라 하기에도 근래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 언저리 쯤, 나는 나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글을 썼었고, 초고를 완성한 뒤, 퇴고를 할 때 글을 쓴 나 조차도 내가 쓴 글이 거북해 퇴고를 하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메인디쉬 없이 온갖 향신료를 뿌린 소스로 가득한 빈 접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느낌이랄까?
책을 읽다보면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작가들이 존재한다. 흔히 말해 비유를 잘쓰는 작가들, 내겐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러했고, 정유랑 작가가 그러했다. 잠잠히 글을 진행하다 툭툭 갑작스레 튀어 나오는 그들의 카운터와 같은 비유들은 나를 넉다운 시켜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을 앗아가버렸고, 그들을 따라하려 아무리 애써봐도 내가 몇일이고 고민해 쓴 비유들은 유명한 쉐프들의 요리를 모티브로한 컵라면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하며 글을 써봐도 그 글을 읽는 것은 나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은 쓰고 싶은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그닥 노력하지도 않았다. 술과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에 빠져 살았을 뿐 내가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도, 낯선 여성에게 어필을 하기 위할 때 뿐이었다.
실제로 무슨 이유인지 소설을 쓰고 있다는 나의 말이 이성에게 어필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술에 취하면 다들 감성적이게 되는 탓일까? 과거 독립출판물로 말아먹은 그리고 지금은 인스타그램 피드의 장식일뿐인 소설의 멋들어진 표지를 보곤 그 사람들은 내게 흥미를 가지곤 했다. 사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책의 내용보단 책의 유무 즉 나의 말의 신빙성이 중요했을 것이다.
낯선 상황일수록 사람은 쉽게 상대를 신뢰하게 되고, 때때로 그 믿음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항상 그 기회를 노렸고, 상대가 더 이상 나를 낯설게 느끼지 않을 때, 나는 무매력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들을 반복, 작가 놀이에 빠져 술 값에 허덕여 이제껏 써온 모든 글이 저장된 아이패드를 중고로 처분하게 되었을 때 부터, 나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지금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이지만, 사실 이 것 조차 핑계인 것 같다. 그냥 지금처럼 공책에 펜으로 끄적여도 되는 것인데) 글을 쓰지 않는 3년간 나는 수학 학원 강사에서 옷가게 알바생으로 옷가게 알바생에서 치킨집, 돈까스 집을 거쳐 일용직 인부가 되었고, 이렇게 상황이 변하게 된 것 모두 술 때문이었다.
그러다 3년만에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같이 일을 하던 아버지 나이대의 한 인부의 말 덕분이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인부 두 명이 사소한 다툼을 벌였고, 아버지 나이대의 한 인부가 다른 인부더러
"왜 말을 x같이 하냐"
라고 말하자, 그 인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x 같이 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라고 답했다. 그렇게 다툼은 사라졌다.
공사장의 인부들에게 있어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지만, 나는 그 순간 그 인부로부터 앞서 말한 존경하는 작가들의 비유를 처음 접한 것과 같은 카운터 펀치를 맞은 기분을 느꼈다.
'아!, 말을 x 같이 해야 내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x같은 글({x|x는 사물 혹은 생물을 뜻하는 변수})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x 같은 글을 쓰겠다 마음 먹으니, 쓰고 싶은 것도, x 같은 비유들도 머리속에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표가 x 같은 글을 쓰는 것이기에 심적인 부담도 없고, 글을 읽는 사람들이 뭐 같은 글이라 비난을 해도 오늘 본 그 인부처럼 호탕하게 웃어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글은 뭐 같이 보이기 위한 글이니깐.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나를 비난해주기를 바란다.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다는 뜻일 테니깐. 피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본따, '필자모독'이라는 제목을 정한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나는 나의 글이 정체를 숨긴 배트맨보다 얼굴을 들어낸 조커가 되기를 원하고 동굴 속 위버맨쉬보다 줄타기를 하는 광대가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