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꽂히는 '아름다움'은?
내 스마트폰에 폴더별로 분류된 무수한 사진과 영상은, 내가 무엇을 아름답게 여기는지에 대한 핵심 단서를 제공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의 아카이빙이라 할 수 있다.
사진첩을 둘러보았다. 멋진 그림 작품이 모여있는 앨범, 재즈나 바이올린 혹은 스키 관련 사진이나 정보를 캡처해 놓은 앨범, 예쁜 바다나 하늘, 노을이나 오로라 사진, 비 오는 풍경 사진이 담긴 앨범 등이 빼곡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상의 풍경, 사람, 오브제 중, 왜 나는 유독 이것들에 이끌렸을까? 나는 무엇을 아름답고 특별하다고 규정할까? 질문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내게 어떤 반응을 유발하는지 생각해 본다. 가장 확실한 반응은 ‘놀람과 응시’다. 그들은 내게 “어!” 혹은 “Wow!”의 즉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또한 마주했을 때 잡념이 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대상 앞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거나 정지한다. 때로는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 여기 있어!”라고 소리친다. N 극이 S 극에 철썩 달라붙듯 내게 존재적으로 달라붙는다. 그래서 기어코 내 삶, 감정의 영역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는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우라’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매우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이성이 우리 반경에 들어올 때 우리는 공기가 일순 바뀌는 걸 느낀다. 비단 외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탁월한 내적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들을 마주할 때도 나는 감동한다.
환갑을 훌쩍 넘겨서도 배우로서 매 순간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톰 크루즈나, 날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색종이로 종이학을 접고, 성경을 필사하고, 뜨개질하시는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도 나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들은 내 영혼과 공명한다. 내 주변 대다수는 비가 오면 우울하고 싫다고 하는데, 나는 늘 비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빗물 먹은 나뭇잎들이 내뿜는 싱그런 천연 향기,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만 같은 두유 빛깔 하늘, 타악기처럼 세상을 연신 두드려대는 음악 같은 빗소리. 이 모든 것은 하늘이 이따금 내게 선사하는 특별 선물이다. 내게는 아름다움 자체다.
미술에서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어떤 형상일까?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들은 모두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나를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미소 짓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때로는 멍하게 만든다.
내 시선이 오래 머무는 작품들은 나를 ‘그 시절, 그 자리, 그 상황’으로 데려간다. 무의식 깊숙이 방치되어 있던 추억, 기억, 상처, 꿈, 소망의 공간으로.
미술 조형적으로, 나는 색이 조화로운 작품을 아름답게 여긴다. 매력적인 포인트 컬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작품이 좋다. 선, 색, 붓 터치가 마땅히 있어야 할 본래 자기 자리를 찾아간 듯 어울리고 사족이 없는 그림이 좋다.
프랑스의 추상화가 베르나르 프리츠, 독일 미술가인 카타리나 그로스,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뉴욕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하는 세계적인 작가 줄리 머레투도 좋아한다. 이들 작품은 대면했을 때 시각적으로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내용면에서는,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주제보다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에 끌린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추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도 새롭고 신선한 미감으로 인정받고 오히려 추대되는 분위기다. 아무래도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이전에 붙들려 있던 고정관념이나 기술에 대한 저항이 기본이기에 그렇다.
기괴함과 추함을 미로 멋지게 승화한 작가도 많지만, 낭만주의자인 나는 작품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행복해지는 그림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술사 거장 중 긍정과 밝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비슷한 인생관과 예술관을 지닌듯하다.
우울하거나 어둡고 칙칙한 그림은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던 르누아르. 물감 살 돈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할 때가 있을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기도 했고, 노년에는 류머티즘에 걸려 붓을 들기조차 어려웠지만 언제나 유쾌한 낙천주의를 고수하며 행복만을 그렸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뜩이나 불쾌한 게 많은 세상인데, 굳이 아름답지 않을 걸 그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르누아르-
책에서 이 구절을 만나고 나랑 너무 생각이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또한 나는 신문 기사나 설명문 같은 그림 말고 시 같은 그림에 더 끌린다. 나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 특히 시를 좋아한다. 시의 본질은 발화(telling)가 아니라 보여주기(showing)다.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더라도 작가가 사실적 묘사만 하지 않고 심리적 묘사도 한 작품이 좋다.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작품 속에 상징과 은유들을 보물처럼 숨겨놓은 작품 앞에 나는 오래 머문다.
이런 작품은 언제나 무수한 이야기를 발설한다. 그리고 내게 오래 말을 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미술 작품은 ‘초대장’ 같다. 전혀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하는 초대장.
한상연 작가의 <철학을 삼킨 예술>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아름다움과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은 어떻게 구분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움과 감각적 즐거움은 둘 다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면 우리 안에는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과 소망’이 일어난다고 한다. 즉 아름다움을 보면, 우리 안에는 스스로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탕을 먹으면 우리는 감각적으로는 즐겁지만, 그렇다고 계속 먹으면 우리 이가 썩거나 당뇨가 생긴다. 사탕은 인간에게 감각적 쾌감을 주지만 우리에게 그것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이나 소망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살면서 아름다움을 끝없이 소망하는데, 아름다움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이러한 동경과 소망이 예술의 참된 근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은 시대마다 달랐고 미인의 기준조차 계속 변화해 온 것을 상기해 볼 때, 어쩌면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찾아 헤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정말 중요한 건, 내가 현재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소중히 여기고 누리는 일이 아닐까? 내가 특별히 끌리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들은, 역으로 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분석해 보면 내 의식 저변에 드리워진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 나의 소망이나 이상, 혹은 숨겨진 결핍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달려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내 취향이나 관점, 기준이 지금과는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 어릴 때 그렇게나 좋아했던 라면이나 돈가스가 지금은 나의 최고 선호 음식이 아니듯, 미래의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결의 아름다움과 취향을 따라갈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기대되고 설렌다. 내 삶이 붙박이 가구처럼 딱 하나의 취향, 신념에 꽁꽁 묶인 채 마감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니까.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내 생각과 기준이 약간씩 변화를 겪을 순 있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평생 아름다움을 좇아 살아갈 것이라는 것.
태생적인 낭만주의자, 탐미주의자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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