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발밑에서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을 만났다.
내 인생곡인, 영국 록 그룹 '퀸(Queen)'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를 여기 경주에서 만나다니.
몇 년 전 경주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 후 가족과 경주를 자주 찾았다. 갈 때마다 불국사, 경주 국립 박물관, 석굴암 등 주요 관광지들을 틈틈이 훑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자주 찾는 장소는 한 곳으로 수렴됐다. 바로 경주 보문 단지 내 보문 호반길이라는 호수 둘레길.
거의 매 계절 이곳을 찾았다. 무료입장인 데다 야경도 끝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고 매력 포인트가 있었으니, 바로 공원 전체에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
돈 맥클레인의 Starry Starry Night, 비틀스의 Let it be, 박효신의 눈의 꽃 등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곡들이 산책로에 띄엄띄엄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릴레이로 울려 퍼진다. 그러다 바흐나 헨델 같은 클래식 거장들 음악이 흐르기도 한다.
공원 중앙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 호수에 오색빛깔이 일렁인다. 공원 산책로 LED 조명들도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시시각각 변신한다. 신라의 고즈넉한 밤 정취에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들.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도 가족과 보문단지 내 굽네치킨에서 치킨을 나눠먹고 어스름 저녁께 산책로를 걸었다. 가족들이 운동 삼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자, 나는 오히려 걸음 속도를 늦췄다. 완벽히 혼자 그 시공간을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수가 온몸으로 품은 노을 빛깔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오렌지빛 하늘은 점차 청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산책로에 나 홀로 남았다. 스피커에서는 익숙한 올드팝들이 울려 퍼졌다.
완벽한 공간에 완벽한 음악. 그리고 완벽하게 혼자. 외로움이 아닌 충만함이 우물처럼 차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나의 발걸음을 즉시 멈춰 세운 건. 느릿느릿 걸음을 완벽한 정지로 이끈 건. 스피커를 통해 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영국 그룹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내 마음이 호수라면, 그 안에 누군가 돌멩이를 툭! 던진 듯 파문이 일었고 동그라미는 정신없이 퍼져나갔다. 누군가 얼음 땡에서 '얼음!'을 외친 듯 나는 순간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몇 년 전 나는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에 빠져있었다. 당시 내 휴대폰 링톤은 그의 히트곡 "Don't Stop Me Now"였다. 프레디 머큐리라는 책도 구해다 읽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Love of My Life를 듣고 있자니, 이 곡을 들을 때 곁에 함께 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우리가 사랑했고 함께 불렀던 이 곡. 그때의 너와 나. 우리의 시답잖은 농담과 웃음소리가 동시에 플레이되는 듯했다. 곡 하나에 파노라마 기억들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리 주제가가 흘러나오니, 가슴에 무방비로 화살을 맞은듯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때 추억들이 깨어나더니 풀 동영상으로 상영됐다.
"너, 이 노래 기억나? 그때 기억나?"라고 말을 걸듯 실타래처럼 한 가락씩 흘러나오는 이 노래.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내어 곡이 흐르는 순간을 동영상에 담았다. 이 순간을 박제해두고 싶었기에.
살면서 우리는 인생 주제가들을 만난다. 듣는 즉시 과거 특정 시점으로 회귀시키는 음악들을. 내겐 'Love of My Life'가 그중 하나다.
이 곡은 영국 그룹 퀸의 1975년 앨범 4집 [A Night at the Opera]에 수록되었고 영국 앨범 차트 1위, 빌보드차트 4위에 오르며, 퀸을 세계적인 그룹 반열에 올렸다. 그 유명한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깊이 사랑했던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아픔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표현한 곡이다.
노래를 듣자마자 한걸음에 내달려오는 추억들. 이 곡을 함께 들었던 '우리'는 더 이상 없지만, 그때의 추억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무지하거나 서툴렀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여러 해를 건너온 지금의 내가 그때를 뒤돌아본다. 기나긴 인생에 비하면 행복과 팡파레는 찰나였고, 이별은 삶에 수시로 개입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떠나오거나 남겨진다. 떠나는 자였거나 남겨진 자였거나, 혹은 이 두 역할을 순서를 바꾸어 몇 차례 반복한다.
연인들은 늘 약속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지켜지는 약속보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훨씬 많다. 사람이 하는 약속은 허약하다. 연인 간의 약속은 더욱 연약하다.
지나간 건 일말의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리움이란 건, 라면 봉지 속 수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인생과 한 세트.
모든 추억은, 시간의 덮개를 덮고 아름답게 윤색된다. 우린 모두 완결 짓지 못한 무수한 약속을 뒤로하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약속들이 파기됐다고 해서 추억들까지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많은 약속을 한다. 사랑에 빠져있는 자에게는 미래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약속은 진심이고 다짐이다.
그러나 살면서 우린 깨닫는다.
지켜진 약속들보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란 걸.
미완결의 비밀스러운 약속 몇 개쯤
기억 속에 묻고 살아가는 게 삶이라는 걸.
인생이란 그저 상실의 과정이라는 것을.
상실은 생명 있는 자의 숙명이다. 하지만 지고 말 것을 확실히 알아도 꽃은 어김없이 핀다. 언젠간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을 알아도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간다.
Love of My Life 곡에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아픔을 절규하듯 흐느끼듯 애원하듯 노래했던 가사의 주인공은 그 후 새로운 사랑을 만났을까? 안개꽃처럼, 프리지어처럼, 장미처럼 다시 해사하게 피어났을까?
어쩌면 인생이란 내 주제가를 채워 넣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 곡들도 결국 추억으로 한 장 한 장 달력처럼 쌓여가겠지만, 나는 오늘도 내 인생 최고의 주제가를 찾아내고 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부르며 살아가야지.
또 혹시 알아? 전혀 상상치도 못한 미래의 시공간에서, 나의 빛나는 과거 주제가들과 조우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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