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선생님 유랑기:마녀와 만담가 사이에서

맞는 선생님을 만나는 일

by 재즈클로이 작가
내 바이올린들


애착 취미 하나를 삶에 들이는 일은, 마치 연애 상대를 찾는 것과 닮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가의 수제 바이올린을 품에 안았을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악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악기와 나 사이를 이어 줄 '사람'이었다는 것을.




01.


[성인이 되어 바이올린 잡고 만난 첫 번째 쌤] : 지구 최강 만담가


초등학교 5, 6학년 때 잠시 바이올린을 잡았다가, 오랜 시간 바이올린은 내 인생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입시, 취업, 직장 생활에 총력전을 벌여 당장 '밥이 되는' 터를 닦는 게 급선무였다.



바이올린을 다시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건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인이 되어 다시 바이올린 취미를 일상에 들이면서, 마음에 쏙 드는 수제 바이올린도 큰 맘먹고 구입하고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처음 만난 선생님은 50대 중후반햇살 같은 분이었다.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잡은 바이올린이기에 뭐든 스펀지처럼 흡수하겠다는 결의로 수업에 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선생님의 열정은 바이올린 티칭이 아닌, 자신의 '인생사'에 있었다.



레슨 10분에 나머지 시간은 천일야화 같은 가족사, 개인사, 자랑들로 채워졌다. 리액션 부자인 나는, 선생님의 최애 대화 상대로 낙점되었다. 선생님은 애교와 웃음이 많고 (일방적인)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한번 잡답을 시작하면 고구마 줄기 줄줄 딸려 나오듯 이야기보따리가 펼쳐졌다.



"내가 피부가 너무 좋아서~ 블라블라블라~"

"나 어릴 때 우리 오빠가.. 내 남편이.. 블라블라블라~"



레슨이 끝나면 직장인이 칼퇴근을 갈망하는 심정이 되었다. 5퍼센트 남은 휴대폰을 급히 충전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듯, 집에 달려가서 바로 침대로 다이빙해 두 눈감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었다.



한 번 '입이 터지면' 쌤은 수업이 끝나도 나를 붙들고 이야기를 했다. 귀에서 피가 난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쌤은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다. 실력 향상이 절실했던 내게 그녀의 외로움은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결국 나는 관뒀다.




02.


[두 번째 바이올린 쌤] : 실력 있는 마녀


이번엔 유학파 출신의 40대 여선생님을 만났다.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성격은 뾰족한 가시 같았다. 우린 전공생이 아니라 취미생들 아닌가. 인생을 어찌하면 좀 더 즐겁고 재밌게 꾸려볼까 싶어, 인생에 양념 치듯 바이올린을 놀이로 배우는 학생들이다.



하지만 보잉이나 음정이 조금만 어긋나도 레슨실이 떠나가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즐거워야 할 취미 시간이 도살장 끌여가는 기분이었다. 레슨생들은 주눅 들어서 눈치만 봤다.



"그게 아니잖아! 연습한 거 맞아? OO 씨 컨디션 안 좋아요?"



레슨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소리에 대들거나 딴죽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우는 것은 많았다. 하지만 가기 싫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레슨 가는 길이 전혀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뭔 부귀영화 누린다고
돈 내고 욕먹고 스트레스 적립해서 오냐!



갈 때마다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선생님 열정은 인정하지만, 나와는 결이 맞지 않았다. 여차저차 개인사 핑계를 대고 그곳을 떠났다.




03.


[3번째 바이올린 쌤] : 내 귀와 마음을 동시에 열어젖힌 천사


'오호라 통재라.. 실력과 편안함 둘 다 겸비한 선생님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고민하던 찰나, 세 번째 선생님을 만났다.



독일 유학파이자 신생아를 키우는 30대 워킹맘. '꾸안꾸' 스타일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질끈 묶은 포니테일, 무심하게 걸친 카디건에서 예술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독일 음대에서 박사까지 수료한 분답게 실력도 출중했다. 첫인상부터, 단정하고 섬세하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 분


한 번은 레슨 휴강인 것도 모르고, 아기를 끌어안고 레슨실에 온 적이 있다고 고백하셨다. 그날따라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었단다. 도도한 선생님이 아니라, 친근감 있고 약간은 허당끼도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우아함과 기품이 넘쳤다. 누가 봐도 프로페셔널한 음악인의 아우라가 온몸에 향수처럼 배어있었다. 대충 무심히 걸친듯한 카디건도, 특이한 디자인의 아방가르드 롱 스커트도, 쌤의 뿌리 깊은 예술가 DNA를 확성기처럼 대변하는 듯했다.


선생님은 온유했다.
잔잔한 시냇물 같은 사람이었다.

수업 중


그녀의 교육법은 남달랐다. 부족한 연주에도 "잘했어요!"라는 칭찬을 먼저 건넸다. 긴장으로 굳은 내 어깨를 툭툭 내리치며 "힘 빼 힘 빼!"라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살포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치 세례 주듯이.



그러면 나는 마법에서 갓 풀린 사람처럼 어깨에서 스르륵 힘을 놓았다. 온유하고 따사로운 선생님의 성품에 내 마음은 활짝 열렸다. 마치 따뜻한 햇살에 나그네가 외투를 훌훌 벗어던지듯.



레슨 받으러 갈 때마다, 메모해 둔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던졌다. 그만큼 선생님이 부담 없고 편했기 때문이다.




[최상의 선생님은 '나와 궁합이 맞는 사람']



어느 날 레슨이 끝나고, 같이 레슨 받는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부산 사투리 억양이 완연한 그분이 눈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가 8년 정도 여기저기서 바이올린 레슨 받아봤는데요. 선생님을 잘 만나야 돼요. 선생님을!!"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나는 손뼉을 딱딱 치며 응수했다. "맞아요. 맞아!"



실력만 있는 선생님은 존경을 얻을 순 있어도 사랑받긴 힘들다. 반대로 성격 좋고 입담만 좋은 선생님은 사랑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존경을 얻긴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선생님을 만들까?



최고의 선생님은 나와 궁합이 맞고 나의 결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내 귀에 들리게 지도하고, 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사람. 내 잠재력을 끌어내는 사람. 그리고 반박 불가의 실력을 겸비한 선생님.



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먼저 마음이 열려야,
귀가 열린다는 것을.


좋은 선생님은 단순히 아는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열어서 귀가 열리게 하고, 내 본연의 감각을 믿게 이끄는 사람이다.



결국 배움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관계'로 완성된다는 걸 깨달았다. 명의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을 넘어 관계를 배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영어강의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다짐한다. 탁월한 실력은 물론이고,시지가 학생들 귀에 들어갈 수 있게 먼저 그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는 선생님이 되자고.

레슨이 끝나고
바이올린은 정말 예민한 악기다. 습도높은 계절엔 제습제 관리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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