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열 번째 편지
나아야 안녕?
어제는 보스턴에도 비가 왔어. 캐나다 산불 때문에 미국 북동부 하늘이 뿌옇다고 하던데, 다행히도 보스턴은 그 영향권에서 살짝 벗어난 듯 해. 뉴욕은 많이 심한 것 같으니 웬만하면 집에 있는 편이 낫겠다.
'그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와 같은 고민은 나아 뿐만이 아니라 나도, 우리 주위의 친구들도,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생각일 거야. 모두가 다 앞으로 전진하며 살고 있는데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도 어느 정도 알 듯해. 왜냐면 나도 미국에 와서 그런 비슷한 감정들을 많이 느끼고 있거든.
나아야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한 회사를 다니다 배우자 해외거주 휴직을 내고 미국에 왔어. 대부분의 여직원들은 '육아휴직'을 하면서 회사를 쉬곤 하는데, 나처럼 아이도 없이 배우자 해외거주 휴직을 내는 사람은 흔치 않은 듯해.
매일 정해진 곳으로 향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동료들과 어울리며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나도 전업 주부가 되어버렸고, 꾸준히 들어오던 수입도 없어서 때때로 남편 눈치를 보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 뭐야.
미국에 와서 조기 은퇴를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야. 사실 나는 정년 때까지 은퇴라는 것에 대해 경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던 생각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이젠 "아 은퇴를 한다면 이런 삶을 살겠구나" 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야.
제일 크게 느끼는 건, 사람들인 것 같아. 회사에 다닐 때는 사업소에서 본사에서,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감독으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일했고 또 열심히 놀았어. 그러면서 많은 선후배, 동기들까지 주위엔 늘 사람들이 들끓었지.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이고, 당연할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더라. 휴직을 하고 지금까지 나에게 잘 지내냐고 연락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심지어 연락 왔던 사람들 중 몇 명은 내게 뭔가를 부탁하려는 목적, 그뿐이었어.
며칠 전, 친하게 지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어. 잘 지내고 있냐며, 그냥 오랜만에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너무 반갑고 가슴이 뜨거워졌어. 과장, 감독, 후배와 같은 직함이 따라오는 내 모습 말고, 진짜 나 그대로를 아끼고 좋아해 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바빴지만, 어쩌면 모든 게 다 가짜 인연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나는 그런 가짜 인연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쓸데없는 감정 낭비를 해야 했고. 이제는 그것이 소용없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아.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면 정말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을 더 챙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려고.
두 번째로 느끼는 건, 직함을 떼고 난 후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운 좋게 어린 나이에 입사하면서 열정적으로 일했고, 좋은 사람들 덕분에 좋은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어.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부끄럽고 웃음이 나와. 깊이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된 것 마냥 우스운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시절.
그런데 있지, 조기 은퇴를 간접 경험해 보는 요즘 어떤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거야.
회사를 떠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어. 어느 한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도 없었고, 나만의 무기라고 할 것도 없더라고. 엄청난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어. 저절로 겸손해지게 되고, 회사를 떠난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 이렇게 글쓰기도 하고 있는 중이야.
마지막으로는 돈과 취미야. 현역에 있을 때 조금 더 모아 놓을걸, 조금 더 나만의 깊이 있는 취미를 길러놓을 걸, 조금 더 나에 대해 알려고 해 볼걸. 정년 은퇴 후에도 돈은 중요하고, 일자리가 사라진 공허함을 진정 달랠 수 있는 취미가 꼭 필요할 것 같아.
나아야! 보스턴은 겨울이 참 길어. 1년 중 6~7개월은 겨울인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이 오기만을 기대해. 얼마 전(6월 말)에 보스턴 여름 시작을 기념하며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춤을 췄어. 다들 얼마나 여름을 기다렸는지 모두의 얼굴에 피어났던 화사한 웃음꽃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조기 은퇴는 나에게 공허함과 쓸쓸함을 주기도 하지만,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아.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