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스물일곱 번째 편지
나아가 쓴 글을 읽으면서 꽤나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어. 마음이 왜 붕 떠 있는 기분인 걸까? 백 퍼센트 다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긴 해. 미국에 남편 따라와서 주부로 지내는 여자들이 겪어야 하는 주기적인 슬럼프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아의 말대로 다 자신만의 계절이 있고, 불안하다는 것은 어찌 됐던 나아가 성장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사실 나도 요즘 테니스 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 대단해 보여서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어.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내 멋진 핑크빛 미래를 그려보곤 해. 그리고 정말 내 인생에서 중요한 "본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게 꽤나 도움이 되더라. 정말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노력해.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번 일기에 썼던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열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나아가 조금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던 거였거든. 흔들릴 때마다 우리의 운명을 사랑해 보도록 하자.
요즘 보스턴은 달짝지근 설렘 공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어. 왜냐하면 9월이 학기가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이지. 보스턴은 하버드, MIT, Boston University 등 다양한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 젊은 도시 중 하나인데, 그래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아주 떠들썩 해졌어. 작년 9월 중순쯤 보스턴에 처음 왔기 때문에 이런 학기 시작 전 풍경은 처음 겪는데, 꽤 흥미로워. 아니, 8월 말이 이렇게나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가득한 달이었나?
요즘 나도 살짝 쳐지는 느낌이어서 힘을 내려고 서점에 들렀어. 그런데 내가 지금껏 가 본 서점 풍경 중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 게다가 칼같이 다섯 시면 닫았던 서점이었는데 연장 영업 공지가 붙어 있었어.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자식들과 함께 서점에 와서 여러 책들을 한가득 사주면서 흐뭇하게 웃던 가족들의 얼굴이야. 그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자랑스러움을 느낄까?
주말 내내 테니스 치느라 MIT 광장을 많이 지나쳤어. MIT 기숙사에 짐을 가져다 놓으러 온 학생들의 함박웃음 너머로 입학식 준비를 하는 분주한 모습들이 보였어. 새로운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이미 까마득하다고 느껴지는 내 입학식 모습도 떠올려 봤는데, 상상만 해도 좋더라. 내 스무 살.
집이 하버드 하우징이라 주변이 아주 어수선해.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들의 실루엣들이 겹치고 가족들이 차 한가득 싣고 오는 짐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해. 길을 지나가다 잔디밭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러서 조금 구경했어. 같은 기숙사 방을 쓸 메이트를 정하고 있더라고. 즐거워 보였어.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기숙사들처럼 하버드 기숙사들도 각자 다른 색과 이름을 갖고 있었어. 모든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 같아.
이렇게 보스턴은 두근대는 젊은 심장들로 막 쿵쾅대기 시작했어. 늘 새싹이 돋는 3월에 이런 기분을 느꼈는데,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8월 말에 이렇다는 게 이색적이고 재밌어.
나아의 스무 살은 어땠니? 나는 정말 많이 어렸고, 철이 없었고, 겁도 없었던 것 같아. 자유라는 것이 주어지면서 그 뒤에 따라오는 책임의 무서움은 외면하고 살았어. 마치 이 세상이 내 것인 양 살았던 거지. 그 당시에는 내가 하는 선택들이 매우 의미 있고, 현명한 것이라며 자부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한참 부족하고 경솔한 결정들도 많았던 것 같아.
무엇보다 스무 살 내 세상은 너무 작았어. 그냥 학교 안에서의 내 삶, 그게 내 세상이었고 그 안에서는 마음대로 먹고 놀고 즐길 수 있으니 더 큰 세상을 보려 하지 않았지. 그게 참 후회되더라. 세상은 정말 크고, 다양하고, 그 속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더 많은 도전을 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쭉 걷다가 집 앞에 도착해서 문득 든 생각, "그럼 지금은?". 만약 지금 내 모습을 이십 년, 삼십 년 후에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내 생활 모습과 결정들은 최선인가? 그러한 생각들. 잘 모르겠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먼 미래에 내가 원하는, 후회 없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아보게 된다. 물론 또 흐트러질 수 있는 다짐이 되겠지만. 그럼 또다시 마음을 다 잡으면 되지 않을까?
나아야, 너무 옆에 사람들을 생각하지 말자. 그냥 몇십 년이 지난 후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하는 삶을 살았나, 그것만 생각하며 살아가자. 나는 늘 진심으로 나아를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