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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play Sep 18. 2018

서른 섬씽(Something)

춘천의 어느 가을 @ 상상마당 춘천, 댄싱 카페인

2017년 어느 가을날


 "주소 좀 알려줘"

 얼마 전, 친구 L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집으로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뽁뽁이로 둘러싸인 택배를 푸르니 예쁜 겉표지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요즘 책들은 참 예뻐"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책 선물을 받아 본 게 언제인가 싶었다. 고마웠다. L은 이 책의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 나에게 선물한다고 했다. 


 책 제목은 이름하여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요즘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인 걸까, 근데 그 타이밍을 안다는 건 좀 슬프지 않아?


여름 내내 푸르던 공지천의 가로수도 색깔을 입어 간다


 책을 챙겨 들고 나섰다. 결정에서 실행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좋아하는 산책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을바람에 떠밀려 가면서 "지금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춘천에는 책을 읽기 좋은 곳이 참 많다. 새로이 문을 연 시립 도서관도 좋고, 소양강변의 카페도, 공지천 벤치에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면서 책을 읽는 것도 정말 좋다. 밖에 나가기 귀찮으면 그냥 집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놓고서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읽는 책도 나쁘지 않다.

 호수를 따라 다시 속력을 냈다. 공지천을 벗어나 의암댐 방면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바람이 제법 차다. 그래도 "일 년 내내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금방 또 추워지겠지.


의암호, 데칼코마니


 상상마당에 자전거를 묶는다. 다소 촌스러울 수 있는 붉은색 벽돌의 건물이지만, 의암호와 참 잘 어울린다. 여행잡지에서 본 체코 프라하성이 이런 느낌이었나. 가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이국적이다.


상상마당 춘천의 노천극장. 이국적이다.


 상상마당에는 꽤 자주 온다. 홍대에 있는 그곳처럼 '젊음'을 느낄 수 있달까. 인디 공연을 볼 수 있고, 매번 새로운 전시회도 열린다. 특히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매주 수요일마다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기 때문인데, 누가 선정하는 건지 몰라도 매번 '취향 저격'이다. 

 허나, 주류 감성은 아니다. 그래서 난 더 좋지만.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7시에 무료로 영화를 상영한다.


 아주 어릴 적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때는 여기가 '어린이 회관'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잘 정돈된 느낌은 아니었다. 붉은색 벽돌의 노천극장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인형들이 춤추던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그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이 모습을 사진으로 보아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보아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아빠 손잡고 춘천인형극제에 왔던 것 같다.

 

 이곳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선명한 건, 전역 후 대학 동기들과 춘천 여행을 왔을 때다. 밖에 잠깐만 서있어도 땀에 흠뻑 젖을 만큼 더운 여름이었는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상상마당 앞마당 풀밭에서 대여섯 명이 삼십여 분 정도 점프를 해댔다. 우리들의 우정을 증명하는 점프샷 한 장을 건지기 위해. 그날 뜨거웠던 춘천의 햇살이 살갗에 닿는 듯하다.


 지금은 머리를 식히러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온다. 영화를 보러 오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러 오기도 하고, 그냥 자전거 타고 밤공기를 쐬러 오기도 한다. 오늘처럼 책을 읽으러 오기도 하고.


Dancing Caffeine, 댄싱 카페인. 이름이 재밌다.


 상상마당 1층에는 참 예쁜 카페가 있다. 이름하여 "댄싱 카페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났다. 춤 추는 카페인?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엔도르핀이 돌곤 하는데 그 기분을 '춤 춘다'고 표현한 걸까. 재밌는 이름이다.


 통유리창 너머로 북한강이 펼쳐진다. 한 폭의 그림 같다. 시간이 멈춘 듯 잔잔하다. 갓 구운 빵 냄새와 커피 냄새가 뒤섞여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하마터면 빵까지 먹을 뻔했다.



 L에게 이곳의 사진을 보냈다. 스무 살 무렵, 춘천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던 L을 만나러 춘천에 온 적이 있다. 닭갈비도 먹고 오리배도 탔는데. 이젠 상황이 바뀌어 내가 춘천에 있다.


 10년 전과 지금. 춘천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여전히 푸르다. 

  

 그리고 우리도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스무 살에는 빨리 서른이 되어
단단해진 어른으로 살고 싶었지만
서른이 넘은 우리들은
서른이 되어도 딱히 변하는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른의 우리들도 여전히 아프고 치이며
행복해하다가 휘청거리기도 한다.
죽을 것 같다가 엉겁결에 살아지기도 하고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기쁨의 순간도 온다.
- 이애경,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중 "서른 썸싱(something)" -


 이미 서른 썸싱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는 "서른 썸싱이 된다는 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게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잘 견뎌 내는 방법을 알아가게 된다"고 했다. 


서른 썸싱,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제는 빨리 마흔이 되어 더 이상 담담해지고 싶지는 않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쁜 순간에 담담해지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소리 지르고 싶다. 힘들 때는 친구와 엉뚱한 얘기들을 나누면서 밤을 지새우고 싶다. 


 너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이 소복이 쌓이면 친구들을 춘천에 초대하고 싶다. 그때는 눈 위에서 영화 <러브레터> 속 후지이 이츠키처럼 "오겡끼데쓰까(お元気ですか)"를 외쳐봐야지. 그럼 그때까지 다들 안녕!



 [TRAVEL TIP] KT&G 상상마당 춘천
 어린이회관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해 현재는 문화 복합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라이브 스튜디오, 갤러리, 강의실, 카페, 디자인스퀘어 등을 갖추고 있으며, 강원도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인디밴드의 공연, 인디영화, 젊은 작가들의 전시, 예술 아카데미 등을 선보이고 있다. 디자인스퀘어에는 마리몬드 등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상상마당 춘천 스테이' 숙박시설까지 완비되어 있어 시민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춘천터미널, 남춘천역 등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남짓으로 접근성도 좋다. 상상마당을 둘러본 뒤에는 상상마당 춘천 -> 춘천 MBC -> 공지천 -> 조각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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