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전하는 뉴스, 이동 보도국
2017년 8월, 뜨거웠던 여름밤.
첫 방송에서 흑역사를 만든 뒤로 나에게는 '주변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문제의 '텀블러(뉴스 진행 시 앵커 옆에 텀블러가 등장해 "PPL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첫 방송의 악몽] 참조)'는 무조건 바닥에 내려 두게 되었고, 데스크에는 원고와 펜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3~4일 정도는 주변에서 그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 왔다. 너무 부끄럽고 괴로워 꿈에서도 몇 번이고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니 그 사건에 대한 언급도 슬슬 없어졌다. 뉴스 진행도 조금은 익숙해져 갔다.
'텀블러 사건'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또 하나의 미션이 주어졌다. 조만간 '이동 보도국'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 '이동 보도국'은 시청자들에게 현장감을 전하기 위해 앵커가 현장에 직접 나가 전달하는 뉴스다. 주로 지역의 대형 이슈(경춘선 복선전철 개통,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등)나 지역 행사(토마토축제, 다슬기축제 등) 등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자 할 때 선택하는 보도 방법이다.
8월에 두 건의 이동 보도국이 계획되어 있었다. '철원 화강 다슬기축제'와 '화천 토마토축제'. 지역민들에게 현장감을 전해주는 것이 목표이기에 두 앵커가 현장에 직접 나가 뉴스를 진행한다. 스튜디오 진행도 간신히 해내고 있는 나에게 이동 보도국 소식은 커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선배들이 진행했던 이동 보도국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선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지만 막막함과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스스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드디어 이동 보도국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철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머리는 평소보다 강하게 고정했고, 유분기를 잡아주는 파우더도 듬뿍 발랐다. <뉴스데스크 강원>은 저녁 8시 20분쯤부터 진행되지만, 방송 준비와 리허설을 위해 6시쯤 현장에 도착했다. 야외에 마련돼 있는 앵커 데스크를 보니 걱정이 컸지만 두근두근 설레기도 했다.
큐시트를 확인하고, 원고를 숙지했다. 카메라와 오디오 점검을 한 뒤에는 리허설이 진행됐다. 야외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일은 예상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인이어에서 전해지는 뉴스 PD 선배의 목소리는 1-2초가량 딜레이 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방송에서 살짝의 틈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센스가 필요했다. 또, 말끔히 다려 입은 흰색 와이셔츠는 금방 땀으로 흥건해졌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축제의 소음들도 차단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크고 정확하게 소리를 내야 했다. 그래도 더위는 참으면 됐고, 소리는 퇴근 후 먹을 치킨을 생각하며 힘을 내면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벌레'였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방송용 조명 아래로 여름 벌레들이 몰려들었고, 벌레기피제를 온몸에 뿌렸지만 어둠 속에서 밝은 빛으로 달려드는 수많은 벌레들을 퇴치할 수는 없었다. 말할 때마다 입으로 자꾸 들어오는 벌레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프롬프터도 말썽을 부렸다. '프롬프터'는 뉴스 원고를 띄워주는 장치인데, 스튜디오에서는 문제없이 작동되던 것이 야외로 나오니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생방송 중에도 프롬프터에 문제가 생길까 봐 선배와 나는 뉴스 원고를 몽땅 외웠다. 너무 떨렸지만 이미 이동 보도국을 많이 겪어 본 선배가 옆에서 중심을 잘 잡아준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이제 생방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땀이 송골송골 맺혀 메이크업을 고친다. 인이어를 끼고 최종 리허설을 해본다. (미처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집중력이 최대한 발휘되는 순간이다. 이윽고 <뉴스데스크 강원>의 시그널이 울리고, 이제 진짜 뉴스가 시작된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뉴스데스크 강원은 철원 다슬기축제가 열리고 있는
쉬리공원에서 전해드립니다."
준비한 뉴스를 힘차게 전달한다. 내 자신을 믿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소리를 뱉어낼 때마다 입가엔 벌레들이 몰려든다. 내 눈 앞엔 벌레들이 가득하고, 온몸에 벌레기피제 냄새가 진동한다. 정말 다행히도 프롬프터는 말을 잘 듣는다. 실전에 강한 녀석인가 보다.
축제 현장의 생동감을 굳이 전달하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그 현장감이 전해진다. 약간 들뜬 앵커의 목소리와 축제의 소음, 그리고 축제를 즐기고 있는 인파들까지.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뉴스를 구성한다. 마지막 엔딩 멘트가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밤바람에 원고가 날아갈까 손에 힘을 너무 주어서 원고 끝은 닳고 닳았다.
"오늘 뉴스 마치겠습니다. 앵커 (뉴스) 끝내주세요."
드디어 인이어를 통해 뉴스 종료를 알리는 선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렇게 뉴스는 무사히 끝났다.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는 박수가 이어졌다. 20분 남짓의 뉴스를 위해서 더운 날씨에 낮부터 준비한 모든 스텝분들이 존경스럽고 감사했다. 나를 옭아매던 인이어와 마이크를 푸르자, 두 다리에 긴장이 풀리면서 쾌감이 느껴졌다.
등을 타고 내려오던 뜨거운 땀, 밤바람이 몰고 온 여름 냄새, 그리고 내 눈 앞을 가리던 날벌레들까지. 지금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날, 우리의 밤은 낮보다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