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가을을 담은 영화 <춘천, 춘천>
*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공간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같은 공간일지라도 그곳에 얽힌 사연과,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공간의 의미는 각자가 부여하는 방식에 따라 변하고 그러면서 타인의 그것과 차별된다. 이런 관점에서 '춘천'도 각자에게 다른 의미가 있다. 영화 <춘천, 춘천>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가을날의 춘천을 찾은 취업준비생과 중년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의미의 '춘천'을 만난다.
한 청년과 중년 남녀, 총 3명이 춘천행 열차 자유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청년은 안절부절못하고, 오늘 처음 만난 것 같은 중년 남녀는 쭈뼛쭈뼛 수줍다. 청년은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난 뒤 고향인 춘천으로 향하고, 중년의 커플은 일탈을 바라며 춘천행 기차를 탔다. 덜컹덜컹. 밤 기차는 춘천역에 도착한다.
청년은 춘천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서울로 일하러 가는 동창을 만난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요즘 그에게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취업은 안 되고, 동창의 이름까지 까먹었다. 그런 자신이 초라하고 밉다. 다음 날, 그는 예전에 친구들과 놀러 갔던 청평사에 간다. 청평사에 가는 낡은 배 안, 갑판에서 소양호를 바라본다. 다시 선실로 들어가려 하지만 낡은 문은 잘 열리지도 않는다. 문 여는 일 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도착한 청평사. 그는 돌아오는 배편을 놓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청평사에서 기도도 하고, 식당을 하는 친구 어머니의 일도 돕는다. 쓸쓸한 가을밤, 식당 야외 평상에 쓸쓸히 앉아 역에서 마주쳤던 동창과 긴 통화를 한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신세한탄을 한다.
중년 남녀는 춘천에 비밀 여행을 왔다. 각자에게 다른 추억이 있는 춘천이지만, 둘이 오기는 처음이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은 각자 배우자가 있지만 서로에게 편안함과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룻밤에 17만 원이나 하는 모텔에서 어색하게 함께 묵고, 다음 날 소양댐과 청평사에 간다. 청평사에 가는 낡은 배 안, 갑판에서 소양호를 바라본다. 이들 역시 선실로 들어가려 하지만 낡은 문은 잘 열리지 않는다. 소양댐에서 막국수를 먹으며 "막국수는 나이 수만큼 비벼서 먹어야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청평사에서 부침개를 먹으며 "가을이 되면 사마귀도 낙엽색으로 변한다"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소하고 은밀한 속 이야기를 꺼낸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모두 춘천의 가을이 배경이다. 춘천역과 청평사, 소양댐 등의 공간들이 각자의 시간과 포개지며 데칼코마니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청년이 느끼는 '춘천'과 중년 남녀가 느끼는 '춘천'은 다르다.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청년에게 춘천은 고향이자 떠나고 싶은 공간으로, 만난 지 얼마 안 된 중년 남녀에게는 추억의 공간이자 어색하고 낯선 공간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각자의 사연과 감정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영화 제목에 굳이 쉼표를 찍어 같은 단어를 반복한 것도 두 에피소드 속 각자가 느낀 '춘천'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춘천, 춘천>이라는 제목에서 공간의 상징성을 담아냈다면, 영어 제목 <Autumn, Autumn>에서는 시간의 상징성을 표현했다.
영화는 큰 갈등도, 큰 위기도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대부분의 씬들이 롱테이크로 촬영돼 배우들의 즉흥 연기가 큰 진정성을 준다. 그렇다고 중년 남녀의 불륜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진솔하게 느껴진다. 특히 청년의 통화 씬에서는 내가 친구와 통화하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또, 시간의 흐름, 구름의 이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빛'이 아무런 필터링 없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영화에 반영되는데 이것이 영화를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특히 중년 남녀가 부침개를 먹으며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빛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난 이 영화의 포스터에 강한 끌림을 느꼈고, 개봉일을 기다려 왔다. 춘천에서 작은 영화를 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춘천 지역 유일한 독립영화관인 '일시정지 시네마'에서 <춘천, 춘천>을 올 가을 메인 영화로 내건 덕분에 가을의 춘천에서 <춘천, 춘천>을 볼 수 있었다.
[TRAVEL TIP] 일시정지 시네마
춘천 지역의 유일한 독립영화관이자 영상제작업체. 영화관은 150인치 규모의 스크린과 약 20개의 관람석으로 구성된 소극장이며, 봉의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강원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립영화들을 상영하는 것은 물론, 영화모임/영화제 등 각종 행사들을 주기적으로 열고 있으며, 영상제작 등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상영작과 각종 행사들은 일시정지 시네마의 SNS(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관람료는 장편 6~8천 원, 단편 3천 원가량.
얼어붙은 날 안아줘. 내 곁에 머물러.
어둠뿐인 이 세상 위 날 위한 빛이 되어줘.
<춘천, 춘천> 엔딩곡, 모성민 '해와 바다' 중
등장인물들은 가을의 춘천에서 답답한 세상살이의 '빛'을 보았을까. 각자가 받아들인 '춘천'의 의미는 달랐을지라도, 춘천에서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 같다.
우리들 마음속에도 각자의 '춘천'이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 조그마한 빛을 비춰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얼어붙은 나를 안아줄 것만 같은, 마치 태양이나 바다같은 곳. 그곳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춘천(春川)이었듯, 누군가에게는 서울이거나, 파리, 혹은 카르툼일 수도.
당신의 '춘천'은 어디인가요?
제겐, 낯설지만 포근하게 저를 품어준 이 춘천(春川)이라는 도시가 '춘천'인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