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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pr 07. 2024

벚꽃 엔딩, 그리고 연애 성수기 엔딩

비수기는 비수기대로

투자에도 비수기, 연애에도 비수기가 찾아왔다. 셀인 메이(오월에 팔아라)란 주식격언이 닳고 닳도록 유명해져서 4월 중순도 되기 전에 이미 팔사람들은 다 판다. 윤중로의 벚꽃거리에도 한쪽 줄은 핀 것도 못 봤는데 벌써 다 떨어져 있었다.


회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윤중로에 이번주에 몇 차례 가서 벚꽃길을 걸었다. 마음도 우중충한데 하늘도 우중충해서 오히려 다행이었달까. 파란 하늘에 새 연인들의 발그레하게 올라오는 볼같은 연분홍빛 벚꽃잎의 대조가 봄처럼 화사한데, 올해 내가 본 풍경은 하늘도 벚꽃도 유난히 하얗기만 했다.


베레모로 한껏 멋을 낸 할아버지부터 핑크색, 하늘색 셔츠에 흰 바지로 커플 데이트룩을 맞춰 입고 나온, 묘하게 노스탤직해 눈가가 촉촉해지게 만드는 커플까지 금세 져버리는 시간을 영원으로 박제해 보겠다고 카메라를 켜길래, 나도 따라서 이 순간을 붙잡아보겠다고 핸드폰을 들었다.


올해는 왠지 모르게 손에 손을 맞잡고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 보다는 나 홀로 동떨어져 멋드러진 자태를 뽐내는 나무에만 시선과 손이 향한다.


벚꽃이 절정인 이번 주말에 절친 오빠가 진행하는 꽃들의 전쟁 이벤트 2차 벚꽃구경은 때마침 몸도 안 좋아서 안 갔다. 연인과 함께해야 할 일들을 일반 사람들과 함께하기 시작하면 연애생활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이 하면 설레고 풋풋하고 즐거운 일도 단체로 하면 그냥 일이다. 함께 걷는 일도 낭만적인 산책이 아니라 군중 속의 정신없는 전신운동 그뿐이다.


사람들도 만나고 그중에 마음 맞는 사람도 찾고 이런 일은 없다. 마음 맞는 사람이 나를 졸졸 따라오거나, 누군가를 나를 특별히 초대해서 이벤트를 만들어야 핑크빛 뭔가 시작되든 말든 하는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인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의 결과인지 이번 시즌은 타이밍이 망했기 때문에 연애 최대 성수기인 크리스마스에도, 벚꽃 개화기에도 결국 솔로다.


크리스마스 땐 앞으로 둘이 함께 쓰게 될 상상을 하며 다용도 유리잔을 사서, 나를 초대해 준 사람 집에 놀러 갔는데, 더 이상 그 잔은 볼 일이 없어졌고, 그 사람 집에 놓고 온 아이폰 충전기와 목에 매고 간 원피스 타이조차 보내준다더니 안보내줘서 다시 볼 일이 없어졌다. 아이폰 충전기야 그렇다 쳐도, 원피스와 타이는 세트인데 그걸 안 보내주는 건 상도덕이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다시 연락하기 싫어서 말았다.


벚꽃이 만발하기 전에는 때마침 전남친에게서 이별의 정갈한 후속조치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소포를 받았다. 받고 싶었던 소포는 못 받았는데, 받고 싶지 않은 소포는 늘 완벽한 타이밍에 도착한다. 인생사가 그렇다. 이번 사랑은 영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최소 영원의 2배를 약속하던 그는 채 2달도 안되어 나의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2월 초에 고민될 때 헤어졌으면 벚꽃이 피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노려볼 수 있었겠지만, 올해는 한 사람만 만나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했던 탓에 벚꽃 데이트를 함께 갈 사람도, 가고 싶은 사람도 없는 형벌이 내려졌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혼 싱글 시절에 일 년에 한 사람만 만나겠다는 무모한 결심이라니. 사랑 신이 노할 결심이다. 다시는 그런 결심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병률 산문집 <<끌림>>에 사랑은 기차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이병률,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중에서


성수기에는 기차가 자주 온다. 솔클을 보내지 않기 위해, 벚꽃을 혼자 보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짝 찾기에 분주하다. 굳이 외국인 만나겠다고 데이팅 어플을 열심히 스와이핑 하지 않아도, 가까운데 사는 사람이 밥 먹자, 일부러 콕 집어 초대해서 같이 뭐 하자 했었다.


그에게 관심과 호감이 조금 있었는데, 너무 여러 가지로 환경이 나와 비슷해서 안 맞을 것 같은 한 가지 지점이 크게 오히려 보였다. 그래서 그 기차는 타지 않았고, 역시나 정각에 떠났다.


기차처럼 사람도 사랑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비수기에는 기차가 드문드문 온다. 급할 것 없이 한적한 때다. 이미 친구에게 부케를 받은 지 6개월이 지나버렸고, 내 생일이 돌아오는 가을도, 다음 크리스마스도, 다음 벚꽃 시즌도 한참 남았다.


비수기 여행의 참맛이 있든 연애 비수기는 비수기만의 매력이 있다. 따스한 햇살에 혼자여도 옆구리 시리지 않고,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성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알아갈 여유가 생긴다.


주식도 비수기에는 열심히 트레이딩 할 생각을 탁 내려놓는데, 쉴 여유가 생겨서 오히려 좋다. 자기계발이든, 데이트든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왔더니 얼마 만에 주말 내내 완전히 집에서 푹 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유가 없어서 못 치웠던 집을 싹 치웠다. 2년 만에 플라스틱으로 된 나름의 가구(?) 배치도 바꾸고, 이사 오면서 그대로 가지고 온, 이 집에는 어울리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큰 물건들도 버렸다. 드디어 누군가를 초대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꽤 널찍해 보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내가 사는 공간에도, 내 시간과 마음에도 드디어 여유가 좀 생겼다. 비수기가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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