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8일 / 나트랑(냐짱), 베트남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했다. 때마침 출근하는 문이 닫혔기에 나는 베트남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벌써 알고 지낸 지 5년쯤 되는 오빠가 하나 있다. 함께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던 언니의 친구였는데, 살가운 성격도 아닌 데다 말도 많지 않은 편이라 금세 친해지거나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그 당시 거의 매일 붙어 다니던 언니와는 점점 인연이 희미해져 지금은 가끔 인스타그램으로 생사를 확인하는 정도가 된 반면, 오빠와는 잊을만하면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별 말은 하지 않는 편. 제법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한때 음악을 했으나 호주에서 요리를 배웠고 한국에서 프렌치 레스토랑과 미국식 바베큐 레스토랑을 하다가 불현듯 미국으로 가버리더니 지금은 베트남 냐짱에서 해산물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베트남이 심심한지 잊을만하면 언제 올 거냐고 물어보는 통에(간다고 안 했는데) 남자 친구에게 ‘여름휴가로 냐짱 가서 오빠랑 새우 먹고 술이나 마실래?’라고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이 ‘어디든 좋아.’였으므로 나는 7월의 베트남행 비행기 티켓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말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정보들을 모으고 냐짱에만 있기에는 조금 아쉬워 서쪽 캄보디아와 가까운 푸꿕이라는 섬에 들어가는 일정까지 계획하고 난 후 티켓 결제와 연차 신청만을 남겨두고 있던 순간이었다. 회사가 평소와 같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랩탑에 고개를 박고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고 있었던 그때,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조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전조는 있었으나 바짝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사람들은 랩탑을 닫고 전장을 떠났다. 모두가 모두의 동료를 잃는 순간이었으나,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조직의 생로병사일 뿐이었다.
사건 이후의 온갖 우중충한 이야기의 터널을 지나서 나는 공식적으로 자유인이 되었고, 한 가지 좋은 점은 연차 신청을 하지 않아도 휴가를 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나는, 다양한 구간을 거쳐(분노, 슬픔, 후련함, 애틋함, 고마움, 미안함, 허탈함 등등) 천천히 마음을 정리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거의 5년 동안 마음을 쏟았던 곳이었고,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좋은 동료들이 넘치는 곳이었다. 회사는 롤러코스터였고 이상한 일들이 쉴 새 없이 터졌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늘 그 모든 나쁜 일들을 희석시켰다.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쳤고 판타지에 가까운 일(일로 만난 사이의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이 실현되기도 했다. 나는 마치 매력적이지만 나쁜 남자 친구를 잊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으며 애착과 애증을 차근차근 도려냈다. 그 끝에 소란스러웠던 문은 가까스로 닫혔고 동시에 아주 조용한 휴가의 문이 열렸다.
생각해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맞이하는 방학이었다. 여행지에서 메일이나 메신저를 확인할 필요도 없고 혹시나 급한 업무 전화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저녁의 공기가 뜨끈해지던 7월의 두 번째 주, 나는 내 연인의 손을 잡고 밤이 촘촘한 냐짱의 공항 게이트를 나섰고 공항 근처의 아주 저렴한 호텔에 도착했다. 손대는 많은 것들이 부서지는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