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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기산 Feb 04. 2020

시트콤 1회 분량의 비극

호기롭게 사업을 시작했었다. 돌이켜보면 별 대단할 것 없는 능력이었지만, 첫 직장에서 받았던 기대와 응원은 나를 무척 호기롭게 만들었다. 내가 직장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굉장한 능력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서른을 조금 넘겼던 큰 그릇의 나는 호기롭게 사표를 썼고, 호기롭게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병든 당나귀처럼 비틀거리며 겨우 걸어가다가, 두 해를 조금 못 넘기고 쓰러졌다. 마침 당시 하고 있던 연애도 함께 비틀거리고 있어서, 나는 내 삶이 드디어 끝장나는구나 싶었다. 이 잔인한 세상이 나를 버렸음을 설명하는 술자리가 매일 이어졌다. 취해서 비틀거리며 돌아와 불 꺼진 방안에 누우면, 우주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세상이 나의 죽을 맛 인생을 알아줬으면 했다. 


 세상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나의 사업이 망한 것과 별개로 사람들은 자기 인생 살아가기에 바빴다. 내 연애가 얼마나 지옥 같은 상황이든 간에, 그들은 제 짝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연이은 망한 인생 설명회에 드디어 친구들도 지쳤을 때쯤, 여느 날처럼 방 안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데, 방구석에 줄 지어둔 소주병 무더기가 보였다. "저게 내가 다 먹은 거라고?" 알콜에 젖어있던 몸이 바싹 마른 북어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자기 연민을 삶의 주제로 삼은 사람을 가끔 본다. 20대 때 알게 된 어떤 여자는 항상 슬픈 눈을 연기했다. 신기하게도 세상의 모든 비극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런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흡족해하며 슬퍼했다.


 자기 연민은 중독적이지만 파괴적이다. 삶의 고통을 합당하게 설명해주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상황을 나아지게 해 주지는 않으니까. 사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연민에 빠져 쌓아 둔 소주병들은 잠깐의 기분을 위로해주었지만, 내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의식을 잃은 내 사업을 수습할 방안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무척 불쌍하구나 라는 의식만 또렷해져 갔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놈일 거야"


 세상에서 나는 제일 불쌍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세상은 내가 무척이나 불쌍해도 딱히 날 어떻게 해주지 않았다. 자기 연민을 파헤쳐보면 깊은 발원지에는, 애처로운 나를 누군가가 알아주고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하는 염원이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는 내가 해결하거나, 해결 못하면 신나게 두드려 맞아야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자기 연민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계속 헛바퀴 도는 바퀴와 같았다. 그렇게 헛바퀴 돌기를 그만두기로 생각했던 날, 모아두었던 소주병을 주섬주섬 담으면서 자기 연민도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내 신세를 한탄하고 싶어 질 때, 내 삶을 좀 더 무심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문장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첫 직장에서 약간의 인정을 받은 애송이가 회사 문 박차고 나갔다가 사업 말아먹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애도 박살난 이야기'. 주인공은 비극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시트콤의 1회 분량 시나리오로 꽤 괜찮은 주제다. 호기롭게 사업 말아먹고 연애 끝장 난 사람이 무구한 인류 역사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냉정하게도 본인에게는 더 없는 비극이 타인에게는 희극인 경우가 많다. 학생 시절, 짝사랑녀의 이름을 부르며 소주병 부여잡고 통곡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깔깔 거리며 웃었다. 


 삶에 비극의 향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할 때, 나는 내 인생을 보는 관객이 된다. 이건 내가 내 인생을 버티어 내기 위해 훈련한 방법이고 안전장치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할 것도, 그래서 굉장히 슬플 것도 없는 일뿐이다. 그렇게 이번 해프닝도 굉장할 것 없다고 무심하게 생각하고 담담하게 지나가는 것. 무척이나 얼간이 같은 실수를 거듭하며 내가 배운 알량한 지혜였다. 역설적이게도, 내 인생이 굉장히 유별날 것 없다는 걸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인생을 잘 걸어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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