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있다'라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해본다.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는 것과 반드시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명확한 삶을 사는 것. 일상에서 그것들을 인지하고 꾸준히 생각하는 삶의 태도. 나에게 '저 사람은 스타일이 있다'라는 건 이런 방식이다. 본인의 삶에 꽤나 견고하게 적용하는 포지티브(positive) 한 기준과 네거티브(negative) 한 기준이 있는가.
스스로 정한 기준에 의해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고, 지향하는 바를 구체화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존재하려면 현재 내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발 물러서서, 객관화해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삶은 1인칭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것이며, 흘러들어오는 강물과 같다. 그래서 흘러 들어오는 대로 삶이 변형된다.
반면 3인칭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도는 무엇이 흘러갔는지 돌이켜본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흘러들어올지 예상하는 것을 시도하며,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렇게 관찰한 현재에서, 그 모습을 유지하든 혹은 변화시키든, 비로소 지향점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위한 기준들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나에게는 최소한 '구린 인간'은 되지 말자라는 지향점이 있다. 나는 훌륭한 인간이 될 자신은 없다. 훌륭한 인간의 기준은 여러 가지지만, 무엇이 되었든 타인의 귀감이 되거나 대단한 도움을 줄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럴 욕망도 없다. 대신 "와 저 자식 어지간히 구린 인간이네"라는 말만은 듣고 싶지 않다. 물론 인간은 서로를 오해하기 마련이니, 타인은 나를 구리다고 착각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스스로의 기준에서 구린 인간만은 되고 싶지 않다. 구린 인간이 되지 않는 기준들을 고민하고 항상 염두에 둔다.
나에게 구린 인간이라는 건 두 가지로 기준으로 판별된다. '생각과 관련된 윤리적 측면'이 하나고, '행동과 관련된 존재하는 양태의 측면'이 나머지다. 전자는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후자는 이 행동이 '젠틀한가'를 고민하게 한다. 전자의 기준을 지킬 때 현실이란 진흙탕 속에서도 악한 인간은 되지 않는 것 같고, 후자의 기준을 지킬 때 고단함 삶 속에서도 최소의 품위를 지닌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스타일에 대한 나의 관념은, 어렸을 적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란 에세이에서 영향을 받았다. 책에서 그녀는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스타일이란, 한 인간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 추구하는 바가 있는가, 즉 그 사람이 내면에 지닌 신념의 유무다. 때문에 스타일이란 좋고 나쁘고의 개념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개념이다. 스타일이 없는 사람으로 지미 카터를 꼽으면서, 윈스턴 처칠과 비교를 한 대목이 인상 깊어 그 문장을 인용하며 마친다.
"줄담배에 술꾼에 심술쟁이로 유명했던 윈스턴 처칠은 본바탕은 천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력과 강한 신념이 그를 확고한 스타일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 中 /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