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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 Nov 09. 2019

저는 왕이 아닌데요

여덟 번째



나는 남들의 친절에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호텔 같은 서비스 영역에 들어가면 몹시 불안해지는데, 내가 받을 권리가 없는 친절을 받으면 마음 깊이 민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 베트남에서 어느 호텔에 묵었다. 첫날 체크인하는데 갑자기 직원이 로비에 앉아 기다리던 내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더니(세상에, 죽고 싶었다) 목에 화관을 걸어주는 것이 아닌가(그 순간엔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행위가 보편적이지 않은 인생을 살아와서인지 나는 남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하는 행위를 지켜보는 것이 몹시 괴롭다. 제가 왕정시대의 왕도 아닌데 왜 제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건가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하고 말할 틈도 없다. 그런 일들은 늘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징조 없이 이루어지며(난 호텔 로비에서 무릎 꿇은 직원이 내 목에 화관을 걸어주는 광경을 그 일 초 전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막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얼굴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직원분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영한다며 활짝 웃어 보였고.


때때로 호텔에선 정말 사소한 일로도 죄송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럴 때도 좌불안석이다. 그냥 커피가 다 떨어졌을 뿐이고 그건 직원 탓이 아닌데 너무 죄송하다고 거듭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나도 마주 죄송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 커피를 혼자 다 드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죄송해하세요. 혹시 내가 컴플레인이라도 걸면 불이익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 때때론 서비스의 생리를 잘 모르겠어서 아리송하다. 직원과 나 사이엔 서로 죄송함만 쌓이는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손님이 왕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내가 돈을 냈다고 해서 남이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그저 자본주의 서비스의 업무를 행하는 것뿐이고 아무 생각도 없다 해도 지켜보는 내가 너무 민망하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서비스라는 명목 하에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낸 돈이 공간이나 물건이 제공하는 편리함이길, 만약 사람이 개입한다면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길 기대하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자세를 낮추어 제공하는 서비스인 것은 싫다. 나는 남들의 친절이 늘 평등한 관계에서만 머물렀으면 좋겠다. 친절한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혹시라도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 굴욕이라면 차라리 친절하지 않은 편이 낫다.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그 편이 더 좋다.


아무도 나한테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정말 두 번 다시는 무릎은 꿇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그런 왕정시대 예절까지 돈으로 샀다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으니,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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