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자신을 미워하기란 너무 쉽다. 자가격리 기간이 끝나고 4킬로가 불어 있었다. 가뜩이나 <애매한 재능>을 쓰면서 10킬로가 불어난 상태였다. 어느 작가 말대로 ‘이게 다 책 살’이라고 넉살 좋게 넘어가면 좋으련만. 한숨이 나왔다. (체중계 치워. 현실 따위 직시하고 싶지 않다고)
봄을 맞아 옷 정리를 하는 데 새삼 입을 옷이 없었다. 프리사이즈, 오버 사이즈라고 산 옷들은 딱 맞다 못해 몸에 착 달라붙는 정 사이즈가 되었고. 딱 맞게 떨어지던 옷들은 팔뚝에 끼여서 들어가질 않았다. 절망 속에 옷 정리를 하면서 급격하게 변해버린 몸과 그럼에도 변치 않는 식욕을 원망했다.
아파트 헬스장에 매달 만원씩을 주며 이용료를 지불하고 있었지만 몇 달째 건물 입구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도 일종의 기부일까. 체념하며 아침 걷기를 계획했지만 일할 시간을 핑계로 미루고 미뤘다.
글쓰기 강연을 나가면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세 아이를 돌보며 어떻게 글쓰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일하세요.”
지금 운동은 내 삶에 몇 순위쯤 될까. 매주 마감이 있는 방송일, 급하게 들어온 외주 원고 작업을 하고 한숨 돌릴 때 브런치 원고를 쓰고, 오후 4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한다. 저녁에는 이미 기진맥진, 휴대폰만 좀 들여다보면 하품이 절로 나온다. 좀만 더 놀고 싶은데... 쏟아지는 잠에 신경질이 난다. 뭔 놈의 인생이 이렇게 팍팍한가. 아이들 재우고 유튜브 요가 영상이라도 좀 따라 하고 싶었지만 무리수다. 아이들보다 먼저 곯아떨어지기 바쁘다.
간밤에는 고해성사처럼 남편에게 ‘초라한 하루’에 대해서 구구절절 말했다. 아무리 동거인이라 한들, 내 약점을 구구절절 말하는 게 썩 당기는 일은 아니었는데. 어디에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초라한 하루.
시작은 운동화를 사러 백화점에 간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런 날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줄근한 기분이 드는 날. 늘어난 허리 치수에 맞게 산 밴딩 바지는 한 번을 접어 있었는데도 핏이 이쁘게 살지 않았고,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만들었다던 운동화는 산 지 두 달도 안돼 천이 벗겨져 실밥이 그대로 보였다. 지구에 좋은 운동화가 내 몸과 재정에는 좋지 않구나, 씁쓸함을 느끼며 새 운동화를 사러 백화점에 들어갔다.
화려한 새 옷을 걸친 마네킹을 빠르게 지나면서 생각했다. 얼른 운동화만 사고 나가야지. 그렇지만 선택 장애 인간은 스포츠 매장을 두 바퀴는 돈 다음에 정할 수 있었다. 아이보리 아이다스 운동화였다. 점원이 오래 걷는 분들에게 좋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마음이 확 기울었다. 신어보니 역시 쿠션감도 좋고, 가벼웠다. 큰 가방을 메고 자주 걸어 다니는 나에게 딱.
백화점에 비친 전신 거울에 새 운동화를 신은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일 년째 미용실에 가지 않은 머리는 개성을 뽐내며 굽실거리고 그나마 넉넉한 상의를 입었다 생각했는데 배 때문에 조금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쇼핑몰 모델이 입었을 땐 넉넉했던 청남방은 타이트하게 몸을 가두고 있었다. 새 운동화를 사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집으로 갈 때는 택시를 탔다.
남편은 ‘괜찮아.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지 마.’ 어쩌면 뻔한 말이지만 최선의 말로 위로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빠지지 않는 살(물론 딱히 노력도 안 했다), 스스로를 쉽게 미워하는 마음, 다른 작가에 대한 열등감, 육아의 가중.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밖으로 조용히 토하는 밤이었다.
“촬영 원고 하나를 썼어.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브런치에 올릴 원고는 못 썼다는 생각에 한심해졌어. 탄수화물을 줄이겠다 해놓고 오후에 밥을 두 번이나 먹었지.”
끝없이 이어지는 셀프 디스. 나는 더 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떠들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카레에 밥을 두 번 비벼 먹었다. 탄수화물은 왜 이토록 중독적인가. 밥솥 위 선반에는 160개 들이 믹스커피 박스가 놓여 있었다. 믹스커피만은 끊겠다고 외친 지 한 달만에 재주문한 맥심 화이트골드였다. 밥을 먹고 따뜻한 믹스커피를 마시면 천국이겠지. 아는 맛이 무섭다고, 상상은 0.000001초도 안돼 믹스커피의 맛을 떠올렸다. 그래도 커피는 등원 후에 마시는 게 꿀맛이다.
아이들이 등원한 다음, 공원 한 바퀴를 돌았다. 새 운동화에 축축한 흙이 묻을까 봐 조금 걱정스러웠다. 점원의 말대로 걷기 좋은 운동화가 확실했다. 전에 신던 운동화보다 가벼웠다. 걸을 때는 레드벨벳의 신곡을 듣고 싶었는데 아이팟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을 들었다.
오늘도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저녁에는 샐러드를 먹을 거라 다짐한다. 다음 날 눈 떴을 때 좀 더 가벼워진 느낌을 상상하며 기분 좋지만, 잘 먹고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난다고 해도 나를 아주 미워하지는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