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가 마녀래요》 (E.L.코닉스버그/문학과지성사)
열 살 여름 우리 집은 아빠 직장이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전 날 골목 친구들과 인사하면서 괜히 눈물이 났는데, 이 친구들과 정이 깊게 들었, 다기보다 전학 갈 학교에서 낯선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새 학교 등교 첫날에는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학교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일제히 나를 향하는 그 눈들이 힘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다행히도 선생님은 내 소개를 대신 해 주었고 나는 말 한 마디 없이 지정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날 쉬는 시간에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준 아이가 바로 그 친구였다. 아,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백 번쯤은 호명했을 테니 왠지 친숙한 이름을 떠올려 본다. 은정이? 현주? 경아? 다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임시 이름을 지어보자. 제니, 그 아이를 우선 제니라 부르기로 한다. 제니는 코닉스버그의 동화, 《내 친구가 마녀래요》에 등장하는 제니퍼에서 따온 이름이다. 제니퍼는 스스로 마녀라고 주장하며 기행을 일삼지만 외톨이였던 엘리자베스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었던 아이다. 아마도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될 것 같은 제니는 우리 집이 어딘지 묻지도 않고 집에 같이 갈 것을 약속했다.
나는 전학 간 첫날부터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막내삼촌 방에서 놀았다. 우리 집은 상가주택이었는데, 이층은 살림집으로 쓰고 아래층은 석유가게와 미용실이 있었다. 그 석유가게 주인이 외삼촌이었고 가게에 딸린 방에서 놀았다. 제니는 그 방을 아주 좋아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제니의 집은 우리 집 방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니가 늘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제니와 나는 매번 다른 길로 다른 방식으로 돌고 돌아 아주 천천히 집에 갔다. 제니는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로 기억되는 아이이고, 그 이미지는 주로 그 길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주머니가 늘 넉넉했던 제니는 그 길에서 이런저런 먹을 것들을 사 주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게 추웠던 날 제니가 나에게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 주겠다며 주머니 속 동전을 꺼내더니 길에 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뭐 먹을래? 제니가 물었다. 커피 자판기라는 물건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내가 어벙한 표정으로 메뉴버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제니가 말했다. 율무차 먹으면 돼. 율무차 한 잔을 손에 든 제니는 한 모금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라고 했다. 과연, 제니 말이 맞았다. 한 모금 삼켰을 뿐인데 온몸 구석구석 온기가 퍼졌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로 몸을 녹이는 게 부질없어 보였는데, 어쩌면 성냥 하나는 율무차 한 모금의 위력을 갖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숫가루랑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했던 율무차 한 잔을 제니 한 모금 나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며 우리는 집에도 가지 않고 추운 거리를 걸었다.
자판기 음료를 처음으로 맛본 것도 제니와 함께였지만, 하굣길에 친구랑 뭘 사 먹는 것도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언제나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책가방을 던져 놓고 골목 아이들과 놀았다. 어둑해질 때까지 다방구나 얼음땡을 하다가 엄마가 부르면 집에 들어가 저녁 먹는 식이었다. 그런데 새로 이사한 동네에는 골목이 없었고, 제니가 있었다. 제니는 길에서 자꾸만 군것질을 했고 집 대신 막내삼촌 방을 가고 싶어 했고 욕을, 잘했다. 전무후무했던 그 욕은 핫도그 빌런을 향한 것이었다.
그날 우리가 선택한 군것질 메뉴는 핫도그였다. 빨간 케첩을 바른 핫도그를 나란히 받아 들고 돌아서 두어 발자국 걷는데 뒤에서 다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또래 남자아이가 제니 핫도그를 낚아채고 도망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 나무젓가락만 남은 제니의 손과 제니 얼굴과 도망가는 아이 뒷모습을 보는데 제니가 소리쳤다. 이 개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제니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쫓아가 봐야 따라잡지도 못할 거 욕이나 퍼붓기로 결정한 올바른 판단이라니! 아마도 나라면 그저 주저앉아 울어 버리지 않았을까. 아쉬운 건 내가 같이 욕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니는 그날 나에게 많이 실망했을 것 같다. 그저, 나에게 남은 핫도그를 제니에게 양보했기를, 그 일이라도 했기를 나는 바란다.
나보다 훨씬 언니 같았던 제니는 내가 모르는 세계를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의 성생활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던 열네 살 때 나는 제니를 생각했다. 아, 그날 제니가 보여준 사진이 이런 의미였구나. 제니가 건네준 책은 글자 하나 없이 사진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이 괴상망측했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성기를 장난감처럼 만지는 사진. 남자의 성기가 너무 커서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었고 나는 그 사진을 그냥 비현실로 받아 들었다.
제니가 왜 툭하면 막내삼촌 방에 가고 싶어 했는지 설명할 때가 됐다. 뭐, 제니가 직접 말한 건 아니니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어느 날 삼촌이 제니를 집에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 걔랑 안 노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돈을 훔쳐가는 것 같다면서. 석유가게를 하는 삼촌은 방에 돈통을 두었다. 길거리에 있는 커피자판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것처럼 삼촌의 돈통 또한 나에게는 열어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삼촌 눈에 나나 제니도 돈의 개념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노는 방에 돈통을 방치한 걸로 보아. 나는 그 후로 제니를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제니와는 서서히 멀어졌을 것이다. 사실은 삼촌의 말을 들은 그날부터 제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삼촌의 의심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나는 더 이상 제니와의 추억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딱 한 번 제니네 집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커다란 철문을 힘겹게 열었을 때 펼쳐진 공장 풍경. 아줌마, 아저씨들은 어쩐지 아이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농담을 하며 일하고 있었고, 공장을 지나 방 문을 열었을 때 방바닥에는 도색잡지들이 널려 있었다. 제니는 어쩌면 삼촌 방을 좋아한 게 아니라 집을 싫어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니퍼를 이해한 엘리자베스 같은 친구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외로운 전학생에게 말 걸어 준 친구의 이름이, 그리고 얼굴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친구가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기를, 온기 가득한 집에서 늘 평안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