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말에는 아직 세돌이 채 안된 처조카가 서울로 놀러 온다기에 함께 하루를 보냈었고, 지난 주말에는 처갓집에 다녀왔었다. 나에게는 무려 삼주만에 푹- 쉴 수 있는 주말이었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마음 편하게 쉴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을 뿐이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아내는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리다가 전략을 바꿨는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마누라 없다고 아주 신났네, 신났어! 입이 귀에 걸렸네?"
아내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와도 어차피 이 싸움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 워크숍을 가야 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금요일 저녁부터 이 집을 차지하고 있을 건 결국 나니까 말이다. 나는 그냥 적당한 타이밍에 눈을 찡긋하며, "그래! 워크숍 잘 다녀와!"라고 외쳐만 주면 아내의 분노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수차례 타격을 입은 아내는 마침내 싸움을 그만두었다.
아내와 나는 결혼한 지 이제 만으로 2년이 살짝 넘었다. 결혼하기 1년 정도 전부터는 양가 허락을 받아 미리 같이 살았었으니 함께 산지는 3년 반쯤 된 셈이다. 만난 지는 벌써 12년이 되었다. 크게 싸운 적도 없이 비교적 서로 잘 맞춰가면서 살고 있던 편이고,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한다. (아내에게는 안 물어봐서 모르겠지만.)
오늘은 금요일 오후 6시 퇴근 시간부터, 토요일 오후 6시 아내의 예상 귀가 시간까지. 모처럼 아내가 옆에 없는 24시간 동안의 일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 금요일, 18:00
드디어 퇴근이다. 이번 주도 참 길었다. 프로젝트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달아놓긴 했지만, 사실상 나 혼자 책임자와 실무자 역할을 모두 맡아 외주업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팀장님도 선배들도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뭐, 하며 뒷짐 지고 있는 터라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심지어 두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고, 그중 하나는 다음 주 월요일에 오픈이다. 어차피 남들이 시키지 않아도 월요일부터는 달려야 하는 상황이니, 일단 방전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기로 했다.
불금.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퇴근을 해야 하는 한낱 회사원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직장인과 이제부터 시작인 젊은이들이 강남역에 한데 뒤엉켰다. 승강장에서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세 번이나 보내고 나서야 겨우 탈 수 있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피 묻은 병원복을 입은 사람과 백설공주와 꼬마 유령 캐스퍼를 봤다. 아 어제가 할로윈데이였던가.
# 금요일, 19:00
트레이닝복으로 옷만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보통의 경우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가는데, 오늘은 조금 일찍 나가기로 했다. 고작 저녁 7시인데도 벌써 깜깜하다. 근처 공원까지 15분, 공원을 빠른 걸음으로 두 바퀴 돌면 25분 남짓,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15분. 한 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을 걸었다. 손목을 들어 스마트밴드 화면을 보니 약 6,000걸음 정도를 걸었다. 오늘 하루 총걸음수는 12,000보. 이 정도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 싶다.
# 금요일, 20:00
집에 다시 돌아와 TV를 틀었다. VOD 다시 보기로 튼 방송은 <숲 속의 작은 집>. 벌써 세 번째 정주행이다. 흥행 제조기 나영석 PD의 첫 실패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잔잔히 묻혀버렸지만, 사실 내가 가장 애정 하는 프로그램이다. 제주도의 숲 속에서 오프 그리드의 삶을 추구하며 혼자 음식을 해 먹고 다양한 미션을 해 나가는 모습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수행해야 하는 행복 실험 역시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기, 갓 지은 쌀밥에 한 가지 반찬으로 식사하기,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보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기등 조바심을 느끼게 하는 도전이 아닌 내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실험들. 힘든 세상살이에서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비자발적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추구하는 그 모습이 좋다. 사실 '숲이 참 예쁘네, 저 작은 집은 얼마쯤 하려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하긴 했다. 그건 반성한다.
중간중간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저녁밥 먹었냐고 자꾸 물어봐서 먹었다고 둘러댔다. 회사에서 일할 때 기력이 딸려서 당을 채우려고 오후에 빵을 하나 먹은 터라 배가 좀 덜 고프기도 했고, 예전에 어떤 교양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좋다고 했었으며, 지금 요리를 하면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야 하는데 오늘은 미세먼지 지수가 '매우 나쁨'인 날이다.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다. 방송 한 편을 모두 보고 나니 9시 반. 더 깨어있으면 배고파질 것 같아서 일찍 자기로 했다.
@ tvN, <숲속의 작은집>
# 토요일, 07:00
7시도 되기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게 다 회사 때문이다. 매일 6시가 조금 넘으면 일어나는 생활을 회사 때문에 무려 9년째 하고 있다. 그래도 덕분에 주말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자연스럽게 체중계에 올랐다. 오, 어제 아침보다 1.2kg이나 빠졌다. 어제저녁에 굶길 잘한 것 같다.
오늘 낮에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온다고 했었기에 청소를 시작했다. 곳곳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물티슈로 소품들과 가전제품 위를 쓱- 닦고, 바닥은 청소기로 훑어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종량제 봉투와 재활용 쓰레기, 닳아서 입을 수 없는 옷을 지하층으로 가져가 각각의 수거함에 버렸다.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내, 저번에 치우라고 한 네 물건을 왜 안 치웠냐며 한 바탕 잔소리를 했다. 공복이 길어지며 예민해졌던 것 같다.
# 토요일, 09:00
근처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주문했다. 분식집의 메뉴 중 김밥이나 볶음밥, 덮밥 등은 모두 '밥'을 주재료로 한 것이기에 탄수화물 위주일 것이고, 국은 나트륨이 많아 몸에 좋지 않다. 돈가스는 고기류니까 단백질 위주의 건강한 식단이 될 것 같았다. 기름에 튀긴 것이긴 하지만 아침 일찍 방문한 것이니 아마 새 기름을 썼을 것이므로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집에서 간단하게 해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오기로 했기 때문에 음식 냄새를 풍기는 것은 매너가 아니며, 오늘도 역시 환기를 시키기에는 미세먼지 지수가 '매우 나쁨'이었다. 역시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다.
# 토요일, 10:00
분식집에서 식사를 마친 후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합정역에서 내려 9번 출구로 나와 쭉- 걸으면 망원동이다. 물론 6호선으로 갈아타면 바로 망원역까지 올 수 있지만, 조금 더 걷는 코스를 선택했다. 오늘 목적지는 당인리책발전소. 예전 상수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전한 뒤 가오픈 기간에 와 본 적이 있었는데, 책 큐레이팅도 좋았고 2층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감나무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이다. 오픈 시간보다 살짝 늦은 10시 반쯤에 서점에 도착했다. 1층 서가를 쭉- 둘러보며 책을 두 권 골랐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함께 주문해서 2층 창가 옆 구석 자리에 앉았다. 아직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무슨 글을 쓸까 한참을 고민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여기까지 쓴 현재 시각은 12시 반.)
이후에는 오늘 새로 산 책들을 훑어보았다. 오늘 고른 책 중 한 권은 연희동의 술과 책이 있는 곳, 책바의 장인성 대표가 쓴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장래희망이 책방 아저씨인 내 입장에서 책방 창업기는 필독서나 마찬가지인데, 회사에서 마케팅을 하다가 그만두고 책방을 차렸다니 완전 내 이야기잖아? 하면서 집어 든 책이었다. 다른 한 권은 브런치에서 '주간 개복치'를 연재하는 이정섭 작가의 <내가 멸종 위기인 줄도 모르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가벼운 문체에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었다.
# 토요일, 15:00
어느덧 2층은 거의 빈자리 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몸도 찌뿌둥하고 슬슬 일어나서 움직여야 할 때. 가방을 싸서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스마트폰 지도를 뒤적거리다 선유도공원을 가보기로 했다. 천천히 걸어서 다시 합정으로, 그리고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공원에 도착했다. 흐린 날씨지만 쌀쌀하진 않았고 곳곳에 단풍이 들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온 듯했다. 손을 잡고 걷는 커플, 벤치에 앉아 함께 도시락을 먹는 가족, 각자 카메라를 둘러메고 출사를 나온 일행 등.
길을 따라 걷고 사진을 찍고 한강을 바라보며 한참을 걷다가 벤치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서점에서 산 읽다만 책을 꺼내 이어서 읽던 중.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여보! 나 지금 속초중앙시장 왔는데, 여기 만석닭.."
"사와."
"어? 어어.. 맛은 내 마음대로 한다?"
"응, 사와."
# 토요일, 17:00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버스를 탈까, 하다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닭강정을 맛있게 먹어야 하니까. 선유교를 건너 당산, 영등포구청, 문래를 지나 한참을 걸어 집까지 돌아오는 길. 붕어빵 파는 가게가 보여서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살 뻔했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집에 도착해서 스마트밴드를 보니 오늘 하루 걸음수는 13,000보. 뿌듯함을 느끼던 순간,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집을 보러 오신 분들이 집이 깔끔하고 예뻐서 마음에 들어하셨다며, 대출만 큰 문제없으면 팔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내 집은 아니지만, 지금 집주인이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던 터라 다행이다 싶었다. (잘만 진행되면 아내 직장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갈 생각이다.)
곧 이어서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타고 있던 버스가 뒤차와 접촉사고가 나서, 경찰과 보험사를 불러 수습하느라 출발을 못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