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랜맨 Jun 11. 2020

시선으로부터의 조각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  06/08 ~10  |  낫저스트북스

글을 모두 써놓고 나서도 제목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는 일이 허다하다. 옷을 살 때에는 한 번 입어보는 것조차 귀찮아 그냥 사면서, 제목을 지을 때에는 단어 하나 글자 하나 바꿔가며 몇 번은 고쳐봐야 그나마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열에 예닐곱이다. 자연스레 책을 고를 때 '얼마나 끌리는 제목인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나에게 전혀 끌림을 주지 못했다. 금요일 저녁, 아내를 만나기 전에 잠깐의 여유가 생겼고 근처에는 평소부터 가보고 싶었던 작은 책방이 있었다. 아내에게 선물할 책과 굿즈를 집어 들었고, 가운데 메인 매대에서 동네서점 에디션으로 나온 이 책을 발견했을 뿐이다. 워낙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고 전작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기대는 했었지만, 아마 인터넷서점에서 스크롤을 내리다 발견했다면 굳이 장바구니에는 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했다.

그리고 에 꼭 맞는 정말 완벽한 제목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심시선'의 삶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시선은 한국전쟁을 겪었고 넓은 바다를 수 차례 건너 떠돌며 인종과 성별, 관습과 제도를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받았다. 하지만 끝내 예술가이자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아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던진다. 소설의 31개 장은 이러한 시선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차근차근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는 구성은 분명한 의미와 재미를 주었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으로 서로 다른 세 성을 가진 아이를 가졌고, 이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을 포함하여 독특한 가족이 만들어다. 평소에는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를 표하며 본인 사후에도 제사를 거부하던 시선의 뜻에 따라왔으나, 10주기를 맞아 단 한 번뿐인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가족 구성원들이 하와이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자 시선을 생각하며 가장 기쁘고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와 공유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시선의 삶, 가족들의 과거와 현실, 시선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끄집어 성별과 인종에 대한 차별, 환경 문제를 푹- 찌른다. 그 끝 섬세하게 뭉툭하다. 협력업체 사장의 테러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화수, 자유분방한 듯 보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품은 지수, 병마를 힘겹게 극복했지만 또다시 유리 천장에 부딪힌 우윤, 못된 행동을 방조하고 무마하려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규림, 무용해 보이는 과열 경쟁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것에집중하고 싶은 해림처럼 내 주위의 누군가 겪었을, 뉴스를 보며 탄식했을 이야기. 소설은 옛날 시선이 겪었을 편견과 오해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책임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베일 듯 섬세하지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듯 뭉툭하게.


이 소설의 제목인 <시선으로부터,>는 단순하게는 주인공인 '심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후손들의 삶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당당하게 맞서던 당시로써는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을 그녀의 모습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으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표지에 그려진 유리 조각은 엄마, 할머니, 장모님 그리고 시어머니로부터 나눠가진 각자 다른 추억의 조각들이 주변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금가고 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 소설은 시선의 아이들이 하와이에서 각자의 고통을 극복할 작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시선으로부터' 시작될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깨어지고 금 간 조각이 밝은 파란색으로 빛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뒤에 간결하게 붙은 쉼표가 이 제목을 완성시킨다. 시선이 바꿔왔던 것처럼, 그녀의 자녀들이 고난과 부조리함을 극복해가는 것처럼. '자, 이제부터는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쉼표 뒤에 어떤 세상이 올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보다 반 발짝이라도 나아진 세상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나아질 세상에 나도 조금은 기여할 수 있길 바라본다.




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 철쭉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가 송이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빛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거의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 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p.281)


"해냈네. 결국 해냈어!"

앤디가 자기 보드를 타고 쫓아와 우윤을 축하해주었다.

"와, 나 너 거의 포기했었는데!"

"포기했었다니......"

역시 그쪽이 솔직한 심정이었구나 싶어 멋쩍어졌다.

"아직 삼십 분쯤 남았어. 이렇게 잘 탔을 때 더 해보자."

우윤은 몇 번 더 시도했고 다시 그렇게 멋지게 타지는 못했지만 전보다는 나았다. 그럴싸했다. 경직되었던 부분들이 기분 좋게 풀어졌고 깊이 빠졌다가도 물을 먹지 않고 올라왔다. 보드 위에 앉아 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

"큰 파도 체질이네. 그런 사람들이 있지."

(p.291)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