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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Jul 25. 2020

밀레니얼 세대의 평화를 위하여

<오늘도 세계평화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유미 | 오키로북스

"앞으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발표를 준비하고,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트렌드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이전 회사에서 근무하던 때, 연초에 팀 운영방향을 공유하는 회의에서 팀장님이 갑작스럽게 선언했다. 한 명씩 준비해서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트렌드와는 엇나간 것 같은데요, 말하려다 참았다. 내 밥벌이는 소중하니까. 나는 이미 만으로도 서른을 넘어선 완연한 삼십 대였지만, 여전히 팀 내에서는 어린 편이었다. 더구나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를 이르는 사전적 의미 때문에 졸지에 밀레니얼 세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듯한 반짝반짝한 눈빛이 옆얼굴에 쏟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팀장님은 본인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주겠다 했고, 그다음 주는 우리 팀의 유일한 90년대생인 막내, 그다음이 나였다.


D-14. 팀장님은 스크린 가득히 워드 파일을 띄웠다. 전사의 부서장 이상이 모여 진행하는 회의에서 공유된 자료라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정의부터, 불과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된 그들의 특징, 요즘 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방법 등이 마치 매뉴얼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들이 모여 밑줄을 쳐가면서 이 자료를 공부했을 생각을 하니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 자료에서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오늘의 쾌락을 위해 내일이 없이 사는 욜로이자,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공간과 물건들을 소비하는 데에 거침없고, SNS에서 자신을 과시만 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처럼 묘사된 이들이었다. 다리도 쭉- 뻗지 못하는 좁은 원룸에서 잠을 청하면서, 경력을 갖춘 신입사원을 뽑는 시대 흐름에 맞춰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와 인턴을 전전하는 내 주위 후배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D-7. 막내의 발표 시간. 막내는 요즘 세대들이 즐겨 쓴다는 말들로 퀴즈를 내며 발표를 시작했다. 내가 아는 건 '얼죽아'나 '할많아않'이나 '띵곡' 수준이었다. 주야장천 '버카충'만 외쳐대는 옆 자리 선배보다는 나았지만, 별걸 다 줄여 말하는 '별다줄'의 시대에 나도 생존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이런 말까지 쓴단 말이야? 하며 신기해하던 분위기는 이내 짜증으로 바뀌어 요즘 애들은 왜 이러냐는 한탄으로 이어졌고, 이내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노하실 거라는 저주로 넘어갔다. 서둘러 본 발표가 시작되었다. 주제는 B급 정서. 마치 그림판으로 5분 만에 그려낸 듯한 촌스러운 색감과 폰트로 구성한 콘텐츠들이 유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한 때 SNS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모 자치단체의 고구마 축제 홍보글을 공유하자 다들 와아- 하며 신기해했다. 그러다 이내 그래서 우리도 저렇게 하면 돼? 브랜드 품격 떨어져서 안될 것 같은데? 같은 대화로 이어졌다. 요즘 애들은 브랜드보다는 재미있거나 자신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소비한다고 지난주에 팀장님이 그랬잖아요?라고 나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정적이 흘렀다.


D-Day.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표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날로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동네 서점들을 소개했다. 블라인드 북이나 생일 책을 판매하는 '서점 리스본'과 '밤의 서점', 매달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 작가가 직접 서점을 하루 운영하며 독자들과 만날 기회를 부여하는 '어쩌다 책방', 여행 작가와 함께 해당 국가나 도시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이에', 매달 한 권의 책만을 판매하며 그 책의 배경과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는 '한 권의 서점' 등.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공간처럼 이용되고 있는 동네 서점들을 활용하여 워크숍을 진행하거나 굿즈를 제작하여 판매한다면 젊은 세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를 풀어냈다. 긍정적인 이야기도 그저 그런 피드백도 있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말.


"요즘 애들은 책 안 읽지 않나? OO이는 요즘 애들 같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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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계평화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포함하여 여섯 편의 단편이 담긴 이번 책은 주요 등장인물로 모두 밀레니얼 세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작 밀레니얼 세대라는 한 단어로 20년의 시간을 묶어낸 만큼, 그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모두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다. <노힙스터존>의 지민은 한창 뜨고 있는 동네에 살지만 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고, <오늘도 세계평화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의 희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멀쩡한 회사에 다니라는 부모님의 압박을 견디며 세탁소를 운영한다. <이대로 보내지는 않으려 해>의 제이는 퇴사 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것을 더 싫어하기 위한 모임'을 만든다.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이따금 비현실적인 이야기들. 마치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되묻는 것 같다.


저... 거기 계신 밀레니얼 세대님, 평화롭게 살고 계신가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타깃, 즉 주요 소비자층이 밀레니얼이니까 "우리는 밀레니얼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회의 때마다 나왔다. 우리 콘텐츠는 밀레니얼한테 통하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모두 한마음으로 밀레니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궁극적으로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요즘 애들이 생각, 소비 습관, 취향, 가치관까지 '요즘'이란 단어로 시작하는 어떤 것이든 일단 내 생각도 들어 보자고 달려드는 통에 처음에는 나도 솔직한 견해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는 팀장에게 이런 피드백을 듣자마자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민이는 참, 요즘 애들 같지가 않네."

회의실에서 태어난 밀레니얼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혼합물에 가까웠다. 그렇게 태어난 밀레니얼은 자고로 스타일 좋은 또래들이 많이 모인 장소를 기웃거리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훌쩍 떠나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술과 분위기에 취해 동틀 때까지 노는 핵인싸에 히피여야 마땅했다. 그러니까 서로 뻔한 지갑 사정 때문에 저녁 약속보다는 가벼운 점심 한 끼 약속을 잡고, 아메리카노가 한잔에 육천 원인 개인 카페를 가느니 프랜차이즈 카페나 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 주변에 널린 밀레니얼의 이야기는 적절치 않았다. 그날 이후 회의 때면 내 생각이 아닌, 어딘가에 아름답고 찬란하게 존재할 가상의 밀레니얼이 할 법한 말을 지어내곤 했다.

(p. 21)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붙잡고 있느라 어제는 뭐 했는지, 어떤 기분으로 지냈는지 묻지도 않잖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시간까지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무작정 흘려보내는 게 맞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면 남의 계획이니 미래니 하는 게 궁금하기나 할 거 같아? 그러니까 우리는 어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더 성의 있게 반추할 필요가 있다니까. 남는 건 살아온 시간뿐이니까."

(p.153)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단어, 예를 들어 전쟁, 혐오, 폭력 같은 말에는 채도가 낮으면서 무채색 계열의 색상을 부여하기로 했다. 반대로 구체적이면서 실체가 보이며, 감각이 느껴지는 언어에는 채도가 높아 눈에 띄는 색상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특정 단어마다 고유한 색상 값을 부여하는 데에는 프리다의 공이 컸다.

"실체는 없는데 늘 우리 삶을 두렵게 하는 것과 사소하다는 말로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되지만 일상 속 분명한 아픔을 구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입력하면 단어 별로 지정된 색채가 작은 점으로 색칠되는 일명 '캔버스 2세대'가 탄생했다.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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