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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행가 Apr 24. 2019

작지만 우아한 도시 브룩살

아침에 사 온 빵과 커피를 먹으니 10시가 되었다.  부활절 방학이고 해서 10살 아들과 근처 브룩살(Bruchsal)에 가기로 하였다.  브룩살은 카를스루에 동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에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궁전이 있다.


구불구불한 일 차선 도로를 천천히 운전하며 갔다.  지역 라디오 음악방송을 틀었다. 여느 때처럼 70,80년대 팝송이 흘러나온다,  어릴 적 김기덕, 김광한, 이종환 등 인기 DJ가 틀어주는 팝송을 즐겨 듣던 세대로서는 그냥 즐겁고 좋다.


도로 앞으로 지평선도 보이고 파란 하늘과 구름도 보인다.  나무와 작은 수목, 꽃도 보인다.  꽃을 뽑고 자발적으로 돈을 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지역 특산물인 아스파라거스 파는 팻말도 보인다. 


작은 도시라 주차하기가 좋다.  돈도 안내도 되는 주차장이 곳곳에 있다.  대신 약간 외곽에 세워야 하는데 그래도 궁전까지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주차해보니 교도소 앞이다.  교도소인데 중세 성 같다.  높은 벽과 철조망이 쳐져 있다.  벽돌로 지어진 중심에 육각형 건물이 보이고 그 옆으로 엑스자(X) 모양으로 4동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죄수들이 알아서 조용히 지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브룩살 궁전 위쪽 엑스자(X) 모양의 교도소

교도소 바로 옆에는 병원이 있다. 갈색 병원 건물이 고풍스럽다.  네모 반듯한 성냥갑 같은 콘크리트 병원 건물만 주로 보았는데 느낌이 좋다.  날씨 탓인가. 

   

병원 전경(Fürst-Stirum-Klinik)                                            

교도소 근처에 김나지움(인문계 학교)이 있다.  교도소 옆 학교는 좀 안 어울리는 조합 같은데 별문제 없나 보다. 집값 떨어진다, 얘들 교육에 문제 있다는 현수막 몇 개 걸려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냥 모든 것이 평화스러워 보인다.  뭐 내가 모르는 뭐가 있지 않을까 싶다.


브룩살 궁전은 기하학적인 질서 정연함이 있다.  반듯하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속았다고 피식 웃게 된다.  건물 밖과 안의 천장, 기둥, 벽에 조각으로 장식한 듯 입체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브룩살 성

이곳은 원래 바덴 공국이 아닌 팔츠 영주 슈파이어 선제후의 거처였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 시절 가톨릭 주교였다가 세속화되어 영주가 된 지배계급을 말한다. 이들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행정에 대한 지배권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브룩살은 팔츠 상속전쟁(Pfälzische Erbfolgekrieg, 1688 ~1697) 당시 루이 14세의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전쟁복구 작업의 일환으로 슈파이어 선제후 다미안 휴고(Damian Hugo von Schönborn)는 자신이 거처할 멋진 궁전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여러 건축가들을 참여시켰다.  그중에는 독일 후기 바로크 시대 거장인 발타자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 1687-1753)도 있었다.

50 마르크 지폐의 노이만

                                        

노이만은 당시 뷔르츠부르크(Wuerzburg) 선제후 소속의 수석 건축가였다.  그가 다른 영주의 성 건축에 참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뷔르츠부르크 선제후와 슈파이어 선제후는 형제지간이다.  이런 특별한 인연으로 슈파이어 선제후는 뷔르츠부르크 선제후에게 노이만을 브룩살 성 건축을 맡기고 싶다고 부탁한다.


노이만은 브룩살 성 건축에도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입구 홀에 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설계하고 교회당 발코니, 앞마당, 부속건물, 수로 등의 건축을 설계하였다.  

1층 홀 입구


궁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1층 홀 계단이 보인다.  입구 양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올라가는 양쪽 계단 사이에 동굴 같은 어두운 복도가 있다.  복도 건너편에는 정원으로 나가는 밝은 공간으로 나오게 된다.  어둠에서 밝은 빛이 비치는 곳으로 이동하며 신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연출이 숨어있다. 공간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조각상이 있다. 


다미안의 후계자인 프란츠 크리스토프(Franz Christoph) 선제후는 내부를 로코코 양식으로 치장한다.  노이만이 설계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화려한 방들을 볼 수 있다. 

대리석방(Marmorsaal)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실내악방(Kammermusiksaal)은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하얀색과 노란색 석회로 벽과 천장을 장식하였다.  대칭이 훌륭하고 세밀하게 정돈되었다.  꽃, 잎과 줄기, 장미 문양이 아름답다. 

실내악 방(Kammermusiksaal)


벽과 천장의 프레스코화들이 아름답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들이 그렸다.  프레스코화는 기술적으로 그리기 어렵다고 한다.  작업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든다.

1층 입구 천장 프레스코화


본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과정이 많다.  석회와 모래를 섞어 천장과 벽에 초벌칠과 덧칠 작업을 한다.  그리고 칠이 마르기 전에 광물질 수성물감으로 빠르게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그림이 벽과 어울리고 형태와 색이 잘 보존된다고 한다. 


프레스코화는 한꺼번에 그릴 수 없다.  한 부분을 완성하고 인접 부분으로 옮겨 그려 나간다.  


전체를 보면서 색채나 명암의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윤곽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천장과 벽에 밑그림을 갖다 대고 탄가루나 눈의 띄지 않는 물감으로 밑그림의 윤곽을 옮긴다.  


배경이 되는 하늘, 나무, 건물에 쓰일 물감은 한꺼번에 개어 보관한다.  색감의 통일을 위해서이다.  


초벌칠과 물감을 바른 정도에 따라 균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프레스코화는 화가가 제자들을 여러 팀으로 나눠 공동작업을 한다.  초벌팀, 물감준비팀, 배경팀으로 나눠 작업을 진행한다.  예외적으로 미켈란젤로는 무엇이든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 때문에 혼자 모든 것을 하였다고 한다.    


성안에 걸려 있는 화려한 태피스트리도 볼만하다.  태피스트리는 실로 짠 걸개그림이다.  브룩살 성은 독일에서 가장 많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는 곳이다.  태피스트리에는 성경, 신화, 이국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는 귀족들이 성을 장식하기 위해 구비해야 하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제작기간도 오래 걸리고 공정이 많아 가격이 비쌌다.  따라서 돈 많은 귀족이나 영주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구매하였다.   각종 연회, 기도모임 등 자리와 분위기에 따라 다른 태피스트리를 걸어 놓지 않으면 영주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1719년 이후 1802년까지 4명의 슈파이어 선제후가 살면서 발전하던 브룩살은 큰 변화를 겪는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도시의 주인이 바덴 공국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 후 바덴 공국의 라인 강 서쪽 영토는 프랑스 소속이 되었다.  대신 1803년 가톨릭 소속의 영토와 재산을 세속 영주들에게 넘기기로 한 협정이 맺어진다. 이를 기반으로 브룩살을 포함한 라인강 동쪽 영토가 바덴 영주에게 넘겨졌다. 


브룩살 성은 바덴 영주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의 미망인 아마리에(Amalie ,1754–1832)가 거처로 사용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녀는 유럽의 장모(Schwiegermutter Europas)로 불렸는데 나폴레옹에 견줄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들은 나폴레옹의 수양딸 스테파니(Stéphanie de Beauharnais)와 결혼하였고 5명의 딸은 유럽의 유력한 왕실과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위들은 바이에른 왕, 스웨덴 왕, 러시아 황제였다. 

아마리에 분수


그러나 그녀의 삶은 예상과 달리 소박하고 조용했다.  일상이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30년간 그녀를 모시던 여성의 일기에 따르면 지위가 높은 손님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녀의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궁전 앞 건너편에 법원 건물 앞에 그녀를 기리는 분수가 있다.  분수의 닲팽이 조각이 지루했던 그녀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듯 하다.


브룩살성은 아말리에 사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영주 가족들은 더 이상 성에서 살지 않았다.  대신 공무원과 군인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바덴 영주 프리드리히 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하면서 궁전은 전시공간과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브룩살은 2차 세계대전 말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다.  궁전도 벽체와 계단만을 남기고 잿더미가 되었다.  1950년 이후 본격적으로 재건이 시작되어. 1975년 다시 개장되었다.  1996년 이르러 1층 프레스코화, 궁전 외부 건물과 정원을 마지막으로 재건을 마무리지었다. 


지금 브룩살 궁전은 시립박물관(Staetische Musieum), 독일 전축 박물관(Deutschen Musikautomaten Musieum), 시민들을 위한 행사와 음악회를 여는 장소로 바뀌었다. 


출출하여 뭐 좀 먹어야겠다 싶어 시내 중심가로 걸어갔다.  날씨가 따뜻해 카페 앞 테이블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테이블에 앉아 나름 햇빛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 주문하고 기다리다 보면 1시간 이내에 먹기는 힘들 거 같았다.  포기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크림빵을 사서 아들과 나눠 먹었다.  100년 넘은 역사가 말해주듯 빵 맛이 예술이다.  아들도 감탄한다.  아들이 아빠 먹어보라며 크림빵을 주길래 한입 베어 물었다.  근데 크림이 다 딸려 입 속으로 들어왔다.  아들이 원망과 아쉬움에 차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었음을 전했다.그러나 입안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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