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15
김선명과의 두 번째 약속 날 지유는 이번에도 일부러 늦게 나갔다. 김선명은 편한 복장으로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늦었네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미인을 기다리는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김선명은 지유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유는 막힘 없이 멋진 대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최근에 영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 근처에 좋은 극장들이 다 몰려 있습니다. 요즘 러브스토리라는 영화가 정말 괜찮아 보이던데 어떻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도 영화 본 지 오래된 것 같네요. 잘 됐네요.”
지유는 재미도 없는 그의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영화를 보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선명이 계획한 데이트 코스는 단성사, 명동, 남산타워였다. 이번에도 데이트 코스 브리핑으로 시작됐다. 지유는 기대를 접고 차라리 군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치 오랜 군생활로 습관처럼 굳어진 듯했다. 아름다운 스토리의 영화는 여운이 깊어 기억에 영원히 남을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남산타워는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청명한 날씨 덕분에 서울 시내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김선명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군대밖에 없는 듯 온종일 군대 이야기만 해댔다. 지유에겐 군인 아저씨의 모습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김선명은 지유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워 보였다.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라면 지유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누구와도 사귀거나 할 생각은 없다고 스스로 되뇌고 있었다.
마지막 주 일요일, 정미소와의 마지막 데이트가 돌아왔다. 정미소는 아예 일찍 나와서 최씨 노인과 장기 한 판을 두고 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미소는 미처 몰랐지만 지유는 장기에 몰입한 정미소를 발견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열 시에 맞춰 파고다 공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우리 재미있는 거 보러 가시죠.”
정미소는 지유의 호기심을 또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뭔데요?”
“그냥 따라오시면 됩니다”
사실 오늘 지유는 용건만 말하고 돌아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인천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세요?”
“두 시간 정도면 됩니다.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아~ 인천이 생각보다는 가깝네요?”
“서울역에서 인천까지 다니는 기차가 있습니다. 인천역에서 그걸 타면 한 번에 서울역까지 옵니다.”
“정미소씨는 원래 집이 어디세요?”
지유는 그에게 관심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생각을 피하긴 했지만 가끔씩 그의 생각이 나거나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정미소의 집은 수원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전쟁 때 피난을 내려와 수원에 정착을 했고, 부모님 모두 살아계시며, 형제는 삼 형제였지만 바로 아래 동생은 지난해 사고로 죽고 이제 막내 동생만 남았다고 했다. 얼마를 걸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대화를 하며 마냥 걷고만 있었는데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발걸음을 멈췄다. 다름 아닌 남대문 시장이었다. 지유는 남대문 시장은 처음이었다. 도둑도 많고, 여자가 혼자 가면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이다. 언젠가 남자 친구가 생기면 기필코 가보겠노라고 생각했던 곳인데 정미소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정미소는 지유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이미 성공을 예감했다.
“와보고 싶었던 곳인데 무서워서 못 왔었어요. 이건 정말 진심으로 고맙네요.”
남대문 시장은 지유에게 있어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사방의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좌판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신기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진해나 마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명동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물론 사람도 많고 북적거렸다. 게다가 군것질거리도 다양해서 눈과 입이 다 즐거운 지상천국 같은 곳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구경 후 지유는 예상치 못한 고민에 휩싸였다. 두 사람에게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김선명에게는 마음이 다치지 않게 말을 해야 할 것이고, 정미소에게는 너무 과한 접근을 막아야 했다. 아예 둘 다 만나지 않겠다고 작정했지만 정미소만큼은 좀 더 만나보았으면 싶었다. 그를 만나면 편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즐거운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놔버리기는 싫었다.
그들은 약속했던 대로 수요일 강의시간에 맞춰 지유를 찾아왔다. 지유는 두 사람 모두 만나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말았다. 왠지 정미소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두 사람의 얼굴에선 평화가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정미소는 다음 날에도 지유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결국 자유롭게 만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게 고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유가 원한대로 이뤄진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정미소는 시험기간이나 주중에는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유는 애가 탔다. 점점 정이 깊어지는 게 두렵긴 했지만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두 사람은 유치하다면서도 가위 바위 보 게임으로 남산 계단길을 걸어 오르기도 했고 쎄시봉에서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의 노래도 들었다. 명동교자를 먹고, 멀리 무교동까지 가서 낙지도 먹었다. 종로 피맛골, 안국동을 돌기도 하고 종로에서 청량리까지 도보로 다녀오기도 했다. 정미소와 지유는 음악 취향이 잘 맞았다. 특히 아바를 너무 좋아했다.
그 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 정미소는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는 사월이나 되어야 돌아온다고 했고 지유는 방학 동안 집에 내려가 있기로 했다. 둘 사이에는 이미 사랑이 싹트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사랑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겨우내 헤어져 있으면서 연락도 어려운 상황이 되자 그리움은 더욱 깊어져 갔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