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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크리스천스>: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두산인문극장 2024 권리


당신은 신을 믿는가? 신을 믿는다면 어떤 신을 믿는가? 하느님, 하나님, 알라, 야훼, 여호와. 이 이름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유일신을 부르는 호칭, 명칭이다. 이렇듯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등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그를 부르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 중 천주교와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침을 따르는 '크리스트교'(기독교)다. 

 

연극 <크리스천스>는 크리스트교 중 '개신교'에 초점을 맞추어 신, 그리고 그를 향한 인간의 믿음에 대해 다룬다. 연극 공부를 하는 나는 인터파크 티켓 연극 카테고리에서 이 작품을 발견하고 곧바로 예매했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족들에 의해 성당에 다녔기에 세례나 성경 공부를 받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하느님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있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내 덕이지만, 나쁜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내게 벌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 

 

그렇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로부터 파생된 천국과 지옥, 천사와 사탄, 원죄와 천벌 등 다양한 종교관 또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믿는 자는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증명되지 않은 것'들은 신을 믿는 자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종교에 대한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을 일으킨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하느님을 믿지만 그리스도교의 종교관을 믿지는 못하는 어떠한 차집합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천스>는 이러한 나의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고 숨통을 틔워주는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제 나름대로 종교의 존재 이유와 신을 믿는 이유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들의 심리를 통해 우리는 왜 이 사회에 종교가 필요하며, 그렇다면 종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이 글 또한 얄팍하게나마 필자가 알고 있는 종교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품과 감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본 개념을 먼저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연극 <크리스천스>

일시: 2024.06.25 ~ 2024.07.13.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연출 민새롬

출연 박지일 김종철 안민영 박인춘 김상보 / 성가대 김도희 김민경 김민중 김시연 김주희 김태임 나수정 유기옥 윤은경 이동근 이진서 임하영 정연구 정희원 주연경 

 

<크리스천스> 줄거리 요약

 

20여 년 전, ‘폴’ 목사는 작은 상가에 개척교회를 차린다. 소규모였던 교회는 이제 수천 명의 성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되었고, 폴은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성전을 짓는다. 그리고 성전 건축 비용으로 진 빚을 10년 만에 모두 갚은 날, 폴은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파격적인 설교를 진행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한 소년이 집에 불이 났는데, 소년은 자신이 이미 탈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화마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소년은 동생을 구하고 불타 죽는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소년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에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폴 목사 또한 이 가르침을 믿고 설파했었다. 하지만 과연 이 소년이 지옥에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폴 목사는 이 소년을 이야기하며 말한다. 

 

"관대하신 하나님이 소년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이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다. 지옥은 없다. 성경 그 어디에도 지옥이 있다는 말이 쓰여있지 않다." 

 

이때 부목사 ‘조슈아’가 폴의 말에 크게 분노하며 토론을 벌인다. 조슈아는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인용하며 지옥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폴은 그 구절이 명확하게 '지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한다. 조슈아는 폴의 설교에 반대하며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하고, 설교의 찬반 투표를 벌인다. 50표의 반대표가 나오고, 조슈아는 그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며 말한다. 


지금은 50명만이 목사님의 설교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눈치 보여서 던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조슈아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이후 장로회의 대표, 한 교인, 그리고 부인회를 이끄는 목사의 부인까지 폴의 설교에 반대하며 등을 돌린다. 그들이 등을 돌리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세속적이기 때문에, 개인적 원한에 의해, 그리고 폴 목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반대하고 교회를 떠난다. 모두가 떠난 텅 빈 교회에서 폴 목사는 자신을 떠나려는 부인과 대화를 나누며 진정한 종교의 의미에 대해 성찰한다. 

 

<크리스천스>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1) '성가대'가 있고, (2) 작품 중간중간 주인공 폴 목사의 내면 심리가 독백으로 제시된다. 이 두 연출은 작품 속에서 관객의 역할을 좌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 연출의 효과에 대해서는 뒷부분에 더욱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소년과 히틀러는 모두 천국에 가게 될까?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교인들이 서로 사례를 들며 지옥의 존재 이유와 그 필요성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었다. 지옥이 없어야 하는 이유로 '소년'이 제시되고, 지옥이 있어야 하는 이유로 '히틀러'가 제시된다. 폴 목사는 그들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도 천국에 간다'라는 문장은 수많은 이들에게 지탄받을 것이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수십, 수백만 명을 학살한 살인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점에서라면 어떨까?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그들의 주님께서 과연 피조물을 벌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천국에 간다면 누군가는 지옥에 가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논리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며 그 이분법적인 기준에 속하지 않는 '그레이존'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느님을 믿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는 신봉자들에게 이 극은 그 믿음의 근원을 흔드는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로서의 종교: 교회는 하나의 사업체다


교인들이 폴 목사를 불신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폴 목사 설교의 '타이밍'에 있다. 왜 하필 그는 빚을 모두 갚은 것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이 설교를 진행한 것일까? 작중에서 폴 목사가 이 타이밍을 의도했는지, 혹은 우연이었는지의 여부는 작품 속 교인들뿐만 아니라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 또한 강하게 흔든다. 올곧은 신념을 가졌다고 비쳤던 폴 목사가 어쩌면 세속적인 욕망에 의해 이 모든 일을 '꾸며냈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폴 목사의 진심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관객은 이때 관찰자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타이밍에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돈’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데, 십일조(십일조)란 본인의 수입 10분의 1을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말한다. (개신교) 싱글맘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며 교회에 십일조를 헌금하던 한 교인은 이에 분노한다.


사람들이 말해요. 목사님이 저희를 이용한 게 아닌가 하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하나의 사업체다. 장로회가 폴 목사에게 발언 철회를 종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회가 원활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은 교인들한테서 나온다. 재정을 관리하는 장로회의 입장에서 폴 목사의 설교는 재정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행위다. 이 때문에 장로회는 폴 목사의 설교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교인들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며 발언 철회 및 조슈아의 복귀를 설득한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철저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폴 목사의 설교를 해석하고 반대하는 모습이다. 작품은 장로회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자본주의를 만나며 어떻게 타락하였고, 이 타락이 종교적 신념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충돌하는 성경의 해석: 하나님은 이용되었습니다


비종교인으로서 작품을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우스웠던’ 부분이 있다. 목사와 부목사가 종교적 해석으로 갈등할 때 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의견을 변호하며 당위성을 부여하는 부분이다. 폴이 이 설교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과 지옥에 관해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슈아는 하나님께서 폴 목사의 발언을 저지하라고 하셨다며 그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사명을 내리고 갈등을 종용하고 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어쩌면 둘 다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인간의 입맛에 맞게 이용당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모든 종교 갈등과 전쟁 속에서 ‘신이 내린 사명’은 학살자인 스스로를 변호하고 합리화할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뜻을 더럽히는 수많은 악행이 자행되었다. 그렇지만 니체가 말했듯 신은 죽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의 이름 아래에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인간은 인간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던 중세 시대는 지났다. 



관객에게 부여된 두 가지의 역할


 앞서 <크리스천스>의 연출을 설명하며 이 연출이 관객에게 두 가지 역할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는데,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성가대의 존재’는 관객이 이 교회의 교인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성가대는 성가를 단순히 한정된 장소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서로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관객과 눈을 맞추며 호응을 유도한다. 관객은 함께 박수를 치고 그들과 호흡한다. 제4의 벽은 무너지고 관객이 작품 안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두 번째로 ‘내면 심리의 독백’은 관객이 전지적 작가 시점, 즉 ‘창조자’의 시점으로 이 공연을 보게 한다. 이 독백은 일반적인 방백과는 다르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갑작스레 삽입되어 있으며, 순간 모든 조명이 꺼지며 어둡고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객을 바라보며 대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의 대사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이 대사가 제4의 벽 너머 관객에게 전해지는 순간 관객은 ‘폴’의 내면을 이해하는 관찰자―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이 된다. 때문에 이 순간 관객은 폴이 흠숭하는 ‘신’이 되어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본다. 



영원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길


조슈아가 이토록 신앙에 충실하고 천국과 지옥에 집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때 어머니를 끝내 크리스천으로 만들지 못했고,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지옥에 갔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동시에 임종 직전 어머니의 두 눈에 비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마주하고 저도 두려움을 느끼며 종교에서 설명하는 사후 세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있다. 종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죽음과 같은 거대한 두려움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또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비극적 결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과 죽음 이후에 닥칠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종교는 이 공포심을 이용해 그들을 종교 안에 강하게 묶어둔다. 목사의 부인이 그를 떠나려는 이유 또한 여기서 시작된다. 부인이 가진 신념은 목사가 가진 것과는 달랐고, 이로 인해 부인은 목사가 지옥에 가서 죽음 이후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까 봐 그에게 반대한다. 가장 버팀목이 필요했을 목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부인의 말은 현재의 삶보다는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종교인의 면모다. 부인이 떠나기 직전, 목사는 부인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 끝에 작품의 메시지가 나온다.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현재에 충실하자. 폴의 말에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고 조명이 꺼지며 막이 내린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 이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에 기대어 가능성을 찾는다. 그렇지만 정말 그 이후가 불확실하다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사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일말의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종교를 비판하는 작품이 아니다. 인간 근원에 있는 공포에 주목하고 종교의 존재 이유를 설득하며, 종교인 또는 비종교인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한다. 이제 우리에게 지옥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닌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에 주목하자.



글: 얘술도서관 에디터 요니

궁금한 것은 꼭 공부해야 하는 탐구쟁이. 뮤지컬이 좋아서 콘텐츠를 전공하며 기획과 마케팅을 배우다 연극을 탐구하고 있다. 가치가 퇴색되고 변질된 현대 사회에서 콘텐츠가, 특히 연극이 가진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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