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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3. 2019

Her Story - 부산 피난 연세대학교

수업은 계속 되어야 한다

1950년 11월에 서울을 떠나 작은 배를 얻어 타고 12월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 인구가 당시 30만 명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난 후, 100만여 명의 피난민이 전국 각지에서 이 도시로 들이닥쳤으니 부산은 총을 들지 않고 싸우는 생활과 삶의 또 다른 전장(戰場)이었다. 전쟁이 금세 끝나 서울로 돌아가기를 우리는 바랐지만 윗분들이 보기에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였던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은 학교에 보낸다'는 부모들의 교육열과 '어려운 시기라도 교육은 멈출 수 없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시 문교부 수장인 백낙준 장관의 굳은 결심에 힘입어 급히 부산 대신동에 전시 임시 대학교가 세워졌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위한 임시 학교를 문교부 장관의 주도 하에 세웠다는 사실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지구 어디에 이만한 교육열의 민족이 존재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학교 가건물이 지어졌고 텐트가 쳐졌다. 우선적이며 전적으로 지원한다는 의지의 실천적 결과로 대학교는 봄 신학기에 맞춰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바닷가 영도 근처에 학교가 마련되었다는 소문이 흘러 흘러 금세 내 귀까지 들려왔다. 텐트와 가건물이었지만 피난지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은 감격이었다. 대학은 나무판자로 급조하여 지은 단층의 가건물과 텐트에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임시 초등학교는 더 열악한 상황이었던지 김기창 화백이 그린 〈부산 천막교실〉(1952년, 종이에 수묵담채, 월간미술, 1998년)을 보면 내가 눈으로 목격했던 전시 교육 상황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천막 아래서 칠판 하나만 놓고 땅바닥에 철퍼덕 앉은 채로 수업을 받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사진 렌즈처럼 포착했다. 그림 속 선생님은 손 등사기로 밀어 거친 갱지에 찍어냈을 법한 교재를 들고 있고 아이들은 허튼짓을 하지 않고 수업에 몰입하고 있다. 극한 상황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고 임시 학교의 어느 누구도 딴짓, 딴청을 할 수 없었다. 배울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특혜였다. 어려운 피난살이 임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초라하나마 임시 연희대학교는 도서관도 갖추고 있어 공부하는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피난 내려온 일부 교수와 일부 학생들만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북으로 자진하여 올라가거나 인민군에 끌려갔거나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했거나 미처 부산까지 피난 오지 못한 동창생들은 임시 학교에 발걸음을 할 수 없었다. 부산 임시 학교까지 올 수 있고 수업을 들을 수 있던 학생들은 그나마 행운과 행복을 손에 쥔 것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성향으로 태어났는지 현상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한 길을 선택했다. 학교에 가는 버스에 막 올라타는 사진이 남아 있다. 물론 사진을 찍으니 밝은 미소를 지었겠지만 찡그리면 뭐 하겠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에너지를 밝게 표출하는 긍정적인 삶이 좋다. 

교수님 수도 부족해서 전쟁 전의 커리큘럼대로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학교는 문을 열었지만 담당 과목별로 모든 교수님이 부산에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가르칠 교수진을 제대로 구성하기에는 수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영문학을 제대로 원껏 배우지는 못했다. 전공과목만으로 이수 학점을 맞출 수 없었고 타 학과의 여러 과목을 졸업 이수 학점에 맞게 선택하여 수강했다. 전화위복인지 영문학 전공 수업만 듣지 않고 타 학과 수업을 들었던 것이 오히려 사회에 나가서 도움이 되었다. 부산 피난 생활 3년간 미국 회사나 UN기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강의를 들으며 어설픈 직장 경력도 쌓아갔다. 나는 오화섭 교수의 멋진 영시낭독법과 희곡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의 강의가 무척 인기를 끌었다. 입학 때 기대했던 다채로운 영문학 강의들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권투 선수가 링 위에 흰 수건을 던지듯 미련 없이 영문과 교수의 꿈을 포기했다.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포기가 빨랐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차근차근 배우고자 유학을 갈 형편도 안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직업을 구해야 했고,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꿈을 포기했다. 그 전쟁 때문에. 

부산 피난 시 임시 연희대학교 앞에서. 알바하며 학교 다니던 시절.
부산 피난 임시 연희대학교에서 영문과 선배(오른쪽)와 함께 총장실 앞에서 촬영. 
학교 가던 길에.
1952년, 친구 고현옥과 함께 전시 연합대학교(연희대학교). 학교 문을 나오면서.
위 사진 뒷면 기록.
연희대학교 행정실로 들어가던 중.
1952년 12월, 부산 영도 연희대학교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
위 사진 뒷면 기록.
1952년 9월 23일 부산 영도 연희대 바로 앞에는 바다가 있어 해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 마치고 자주 해변가로 내려갔었다. 맨 오른쪽이 나.
위 사진 뒷면 기록.
바다가 보이는 학교 운동장 끝에 앉아 공부하던 중. 
6.25. 피난 시절, 부산 영도 임시 학교 앞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위 사진 뒷면 기록.
6.25. 전쟁 중 부산 영도 임시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시절 촬영한 사진들의 앨범 한 페이지.
뒷줄 가운데가 나. 피난 시 임시 연희대학교 교정에서.
1952년 즈음. 전쟁 중이었고 하염없이 친구 홍장기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위 사진 뒷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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