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3. 2019

Her Story -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우리집 뒷산 건너 저 멀리는 돈암동이었다. 그쪽 산 높은 곳에서 조선 사람들이 계속 꾸역꾸역 넘어왔다. 조선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흰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어른들은 흰옷을 입고 살았다. 저녁 무렵이 되니 잿빛 어둠은 다른 모든 사물들을 가려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흰 무리가 흰 꼬리를 이루며 한없이 꼬물꼬물 내려왔다. 나는 멀리서 건너편 앞산을 내려가는 흰옷 입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돌았다. 이북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이고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서울 위쪽 지역 사람들도 섞여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본 적도 없었다. 전쟁은 달리기 경주할 때 울리는 시작 총소리처럼 모두에게 정확히 알리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우리 같은 평민들에게는 정보가 신속히 제대로 도달할 리가 없었다. 우리집은 동대문 앞 대로에서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와야 했다. 신작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금세 알 수 없었다. 동대문까지 나가봐야만 목격할 수 있었다. 

6월 25일,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돈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북에서부터 온 사람들인지 윗동네에서 온 피난민인지 이미 흰옷 입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꾸역꾸역 내려왔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온통 법석을 떨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달력과 시계의 날짜와 시간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목격하고 체험한 사건과 나의 사고, 행동, 그리고 반응이 중첩된 기억의 시간을 따라 한 덩어리로 내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온통 법석을 떨었던 것이 6월 25일 새벽 이후 몇 시간, 며칠, 몇 주가 지난 다음이었는지 수치로 보여줄 수는 없다. 동대문 대로로 나가보니 벌써 총을 멘 인민군들이 줄줄이 걸어가고 있었다. 동대문 건너편 길로 갔다. 흰 와이셔츠가 열어젖혀진 채 한 남자가 검붉은 피로 물든 부푼 배를 드러내 놓고 죽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시체를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고 이러한 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무슨 교수래"라고 수군댔다. 의도적으로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너무나 무서워 길을 피해 돌아섰다. 광화문 쪽에 친한 후배가 살고 있었는데 후배는 잘 있을까 걱정스러워 광화문 후배네 집까지 걸어갔다. 후배는 없었고 집안에 두어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이 후배는 큰 탈은 없었고 아직도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시가전이 있는 것은 아직 아니었다. 분위기는 어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밤에는 펑펑 대포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우리 동네 쪽에는 크게 폭격 받아 파괴된 집들도 아직은 없었다. 우리는 남들 따라서 전쟁 발발 후 즉시 피난을 가지 못했다. 시골 어디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서울내기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한강 다리가 끊어졌다고들 했다. 여기저기서 이 소문 저 소리가 들려왔다. 어른이나 아이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한 치 앞을 몰랐다. 시내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성곽 안에 갇힌 사람들 같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지속되면 먹느냐 못 먹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될 것이었다. 집안에 식량은 다 떨어져 갔다. 동네 근처에서 콩깻묵이란 것도 얻어다 먹었다. 동네 사람들이 시골 쪽으로 내려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옷가지를 주고 먹거리와 바꾸라고 했다.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이건만 우리집 어른들은 무언의 근심 걱정만 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으면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냐고, 앉아서 굶어 죽냐고 내가 큰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식량을 구해오겠다고 내가 나섰다. 막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간, 겨우 스무 살 내기였다. 엄마가 굶어 죽으면 죽는 거지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막아섰지만 나는 고집을 피우며 쓸만한 옷가지들을 챙기고 다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창신동에서 마포까지 걸어갔다. 한강 기슭에서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은 할아버지 사공을 만났다. 다리는 끊겼고 나이든 뱃사공은 나룻배로 강을 건네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강 건너편 기슭에만 내려주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지도도 길 안내할 사람도 없었다. 길을 알지도 못하면서 걸어서 소사라는 데까지 갔다. 학교 단체 활동 이외에 난생처음 그리 멀리까지 가보았지만 쌀은 구하지 못했다. 그렇게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다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데 묶어 세워 놓은 청대콩 다발이 보였다. 청대콩 두 다발과 고구마 한 소쿠리 정도를 가지고 간 옷가지와 바꾸었다. 그들은 이 전쟁통에 그런 옷가지가 필요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여름날은 푹푹 쪄댔고 등짐을 처음 지어보니 무게에 짓눌려 계속 걸어갈 수가 없었다. 기진맥진 지칠 대로 지쳤는데 마침 길에서 손주 한 명만 태우고 할아버지가 끌고 가는 리어카를 만났다. 할아버지에게 리어카에 짐을 싣게 해달라고 청하고 나도 리어카를 밀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응해주었다. 

여름 폭염 아래서 리어카를 밀며 따라가는 도중에 길에서 막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던 인민군을 만났다. 우리 네 사람도 인민군의 눈에 띄어 모두 잡혔다. 이미 잡힌 사람들이 줄지어 북쪽을 향해 끌려가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지만 침착하게 ‘집에 노인들만 있어서 먹을 거 구해 가는 길이니 제발 보내달라’고 거듭 애원했다. 애원이 통했는지 다행히 겨우 풀려났다. 겨우겨우 한강 좌안에 도착한 순간 B29 폭격기가 굉음을 울리며 머리 위로 낮게 지나갔다. 인민군을 치는 거라지만 그 상태로 걸어가다 보면 우리도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총알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늘에서 보면 민간인과 인민군들이 섞여 있어 피아(彼我)를 구분할 수 없었다. 서둘러 막 배에 올라타려는데 B29가 다시 지나가며 무차별로 쏘아대는 '타타타타따따' 하는 총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이제 죽는구나! 동생을 끌어안고 강 옆의 호박밭에 잽싸게 몸을 숨겼다. 총알 소리는 머리 위 사방에서 피융피융 들리는데 총알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총소리가 잠잠해지고 세상천지가 고요해졌다. 곧이어 아주 어린 시절 여느 여름날 같은 평화롭고 고요한 자연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정신을 차리고 꿈틀거리며 일어나 배를 탔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무법천지 난리통에 마포에서, 우리 집을 놓아두고 피해 있던 종로 3가 언니네 집까지 어둠 속에 걸어가는 것은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래서 나룻배가 한강을 다 건넜을 때 뱃사공 할아버지한테 동생과 잠잘 곳이 어디 없겠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마당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손녀들이 평상과 멍석 위에서 이미 자고 있었다. 그 평온한 모습을 보니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방 하나를 내주며 그 방에서 자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그렇게 생면부지 마포 뱃사공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둘러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니 집에서는 이 전쟁보다도 더 큰 난리가 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생사가 엇갈리는 서울 바닥에서 다 큰 딸 둘이 안 들어왔으니 부모님이 그 밤에 얼마나 속을 태우며 걱정했을까, 그때는 식량을 구해와야 한다는 생각만 했고 '다 할 수 있다'는 치기(稚氣)에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조차 못했다. 막상 집을 나섰으니 도중에 돌아오지는 않고 목적 없는 목적지까지 다녀왔지만 학교만 다녔던 서울내기에게는 참으로 눈물겹게 버거운 '여정'이었다. 부모님을 만나고는 침을 삼키고 눈물을 참았다. 뭔가가 걸려서 한참이나 내려가지 않는 듯 목울대가 아렸다.

한 번은 난생처음 장사라는 걸 했던 기억도 난다. 뜨겁던 어느 여름날, 길거리에서 짐을 메고 오는 어떤 여학생을 만났는데, 뭔가 물으니 광나루 쪽에서 참외를 구해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가보자고 마음먹고는 다음날 도시락을 싸 들고 배낭을 메고 그 여학생을 만나서 함께 길을 나섰다. 광나루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다니 가혹한 전쟁통이 아니었다면 왕복으로 다녀오지 못했을 것이다. 광나루에서 노란 참외 마흔한 개를 사서 등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렇게 받아온 참외를 청계천 옆 흙길에 펼쳐 놓고 팔았다. 남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끌려갔으므로 대낮에 남자들이 앞장설 수 없어 생계를 위해서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좌판을 벌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서울 촌뜨기들이었던 내 친구들도 시장 바닥에 나가 장사를 했다. 전쟁통에 학교는 문을 닫고 식량은 점점 구하기 어려워졌고 생활은 더할 수 없이 궁핍해졌으니 누구든 뭐라도 나서서 해야 했던 시기였다. 

전쟁은 먹고사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무서운 일은 도처에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연희대학교 2년쯤 선배라는 누군가가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영문과 선배도 아니었고 수상쩍었다. 나는 시집간 종로 3가의 언니네로 일단 도망가 숨었다. 머리 모양도 어른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한복을 입고 다녔다. 당시에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많은 학생들이 이북으로 넘어갔다. 이후 두어 차례 중요한 일이라며 찾아왔는데 나는 이런 상황을 피해 다녔다.

나의 여고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던 박목월 시인의 아들 박동규 교수는 글 '파란 하늘 아래서 자두를 팔던 어느 날'에서 배가 고팠던 열한 살 내기 그가 장남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느라 난감했던 나날을 묘사했다. 원효로에서 세검정까지 걸어가 자두를 받아와 광화문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자두를 팔던 어렵고 서러운 시절의 심정을 절절이 표현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청계천변에서 참외를 받아다 팔던 어느 날 하루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어린 소년 박동규 교수처럼 겹설움이 차오르지는 않았지만 세상이 왜 이리 갑자기 뒤집혀서 이런 지경에 놓이게 되었는지 황망하기만 했다. 

유엔군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전세는 역전되어 9·28 서울 수복이 되었다. 골목길 안 우리집에서는 북으로 진격해서 올라가는 국군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대학 1학년생이었지만 그날로 나의 모교 이화여자중학교가 어떤지 궁금해서 정동으로 향했다. 서울고등학교까지 오니 오른쪽 길가에 불덩이가 살아 움직이듯 강렬하게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려는데 어디선가 '삥!' 하는 굉음을 내며 총알이 건너 쪽에서 내 앞을 지나 불덩이 쪽으로 날아갔다. 무섭다는 말 이상의 표현이 뭐가 있을까. 얼른 정동 골목길로 들어서서 이화여자중학교에 서둘러 들어가니 한문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막 야단치며 왜 왔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웬 호기심으로 그랬는지 애교생(愛校生)이라서 그랬는지 학교는 무사한지 알고 싶었다.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다른 길은 끔찍한 광경을 피해 갈 줄 알았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정동길을 따라 법원까지 왔다. 왼쪽은 덕수궁 담인데 법원 앞길 양쪽으로 며칠은 되었을 시체 몇 구가 길바닥에 있었다. 얼굴의 두 눈과 입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커다란 검은 구멍에 벌레들이 우글댔다. 부패하여 눈 부분만 뻥 뚫려 검은 동굴 두 개가 있는 것 같은 시신을 보았다. 시각적 충격이 너무도 커서 더운 날의 끔찍한 악취는 기억에 새겨지지도 못했다. 너무도 무섭고 오금이 저려와 눈을 가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빙 돌아서 을지로, 청계천 다리를 지나 종로 3가쯤에 도달했다. 탱크나 장갑차가 지나갔는지, 옷 입은 채로 뭔가 엄청나게 무거운 것에 깔려서 책받침처럼 납작해진 시체를 보았다. 극심한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언니와 둘이 건넌방에서 누웠다. 방금 목격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순간, 오른쪽 저멀리 산너머에서 뭔가 '빵!' 하는 폭음(爆音)이 터졌다. 곧이어 찰나의 시간이 겨우 흘렀을 뿐인데 커다란 총알이 창호지 문을 뚫고 '빡' 하고 날아와 건너편 옷장으로 들어가 박혔다. 우리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 말도 못했고 새끼손가락 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도 정지되고 피의 흐름도 멈추는 것만 같았다. 죽는 순간인 줄 알았다. 언니와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면 둘 다 그날 총알을 맞고 죽었을지 모르겠다. 검지만 한 총알이었다. 옷장에 맞고 떨어져서 다행이었다. 다른 곳에 맞았으면 집이 홀랑 타거나 무너지거나 했을지도 몰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오락가락했고 서울 시내를 걸어가며 무수한 시신들을 봤을 때는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그때 놀란 가슴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듯하다. 스무 살 나이에 그런 끔찍한 상황들, 피 흘리며 죽어 있는 사람들, 내장이 다 드러난, 부패한 시신들을 보면서 걸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이 기억이 지워지고 사라질 줄 아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런 기억은… 다시 생각해도 진저리치게 된다. 

그렇게 서울에 고립된 채 두어 달이 지났을까?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으로 북으로 진격해 평양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날이 선선해질 즈음 이번엔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선은 다시 남으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번졌고 공포와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어른들은 급히 전 식구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서둘러 손에 들고 등에 지고 갈 수 있는 정도의 짐을 꾸렸다. 우리는 이런저런 생필품과 솜이불을 쌌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겁고 부피 큰 이불을 지고 가냐고 희한하게 생각하겠으나 이미 추위가 닥쳐오고 있었고 거처가 보장되지 않은 어디론가를 향해 가야 했으니 어른들의 판단이 현명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나섰다. 


작가의 이전글 My Story - 보통 아닌 보통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