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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3. 2019

My Story - 보통 아닌 보통 엄마

 

엄마를 한 명만 경험해봐서 다른 엄마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함께 살아도 잘 모르는데 안 살아본 남의 엄마를 어찌 알겠나. 단지 나의 엄마가 다른 많은 엄마와 다른 점은 직장으로 출퇴근을 했고 친구들의 엄마들은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상상 외에 그들이 머물며 어찌 살아갔는지 다른 집의 삶을 잘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엄마가 바깥일을 하며 구체적으로 어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어떤 한 단어로 지칭되는 카테고리에 엄마를 포함시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니 무슨, 울 엄마는 평범한, 보통 엄마인데.”라고 응수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지난 세월을 훑어보며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고 보통인데 보통이지 않은 엄마였나 자문해 본다. 

동네에서 약동이라고 불렸지만 신동이나 천재라고는 불리지 않았던 엄마이다. 친구들의 엄마도 그랬겠지만 나의 엄마도 뭐든 다 잘했다. 왜냐하면 엄마니까. 엄마들은 보통 그 정도쯤이야 다 해내는 능력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시선으로 엄마를 보며 살아왔다. 도우미 언니가 있기는 했으나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렴풋이 엄마가 내는 도마질 소리를 들으면 이불 속에서 포근한 행복을 느꼈다. 장미 무늬 그림이 있는 그릇 세트를 사러 아이들을 데리고 흥겹게 백화점에 갔다거나, 직장생활하며 그리도 바빴을 와중에도 성탄절 이른 아침을 위해 작은 선물꾸러미 한 개씩을 머리맡에 놔주었다. 나는 그 덕에 선물 포장지 뜯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눈꺼풀이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애들을 일일이 깨워 일년 내내 부스럼이 나지 않아야 한다며 부럼을 깨물라고 했던 엄마. 아버지가 징징 울어대는 아이의 이에 무명실을 묶어 뽑아내면, 엄마는 마당으로 나가 까치가 물어간다며 기와지붕 위로 이를 던졌다. 더운 여름 날 물놀이 계곡에 데리고 가서 대여섯 살배기에게 수영을 가르치려던 열성적인 엄마의 모습은 어느 누구의 엄마와 비슷하다. 용돈을 따로 주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설날과 생일, 자식의 출장길, 그리고 특별한 날에는 축하 문구나 안전을 바라는 글을 적은 하사금 봉투를 건네던 엄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일상생활에도 원칙을 고집했던 엄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안 되는 것에는 “안 돼.”, 한 마디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지금까지도 나의 투덜댐을 한없이 받아주는 엄마이다. 가정과 일, 가족과 커리어의 이분법이 주는 딜레마 속에서, 외부에서 한없이 분주하며 집안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과를 꾸려가기 위해 열심히 노를 저었을 것이라고는 최근에 와서야 든 생각이다.

수술과 입원을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엄마는 낮잠을 자거나 늘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에 엄마 집 현관을 열고 들어선 나의 인기척에 소파에 누웠다 급히 일어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내가 왜 흠칫 놀랐나 곰곰 생각해봤다. 누워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이런 모습을 점점 더 자주 대하게 되었다. 90세였던 작년만 해도 쉬고 낮잠 잘 짬이 없다던 엄마였는데 올해는 소파에 자주 눕는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분과 초를 아껴 썼나 보다. 학창 시절에 매일 농구 선수로 맨 땅에서 연습을 하고, 미술반에서 그림을 한 장씩 그리고, 때때로 육상 선수로 활약하고, 학과 공부하고, 서울이나 지방 원정 경기도 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바빴을까 상상해본다. 한 단계씩 헤쳐나가며 울타리 너머의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던 여학생. 홀씨 한 톨의 싹을 틔워 왔던 젊은 여인. 세상이 흔들리고, 전쟁이 나서 피난살이하는 와중에 일자리를 구하고 살아온 젊은 나날, 아이들 넷을 키워낸 엄마의 삶을 훑어보니 드라마틱하게 흘러간 인생 한 편을 바라보기에도 숨이 차오른다. 물론 나는 이런 시절의 엄마를 직접 관찰하지는 못했다. 한 날 한 시에 양쪽 무릎 수술을 받았던 팔십 세의 엄마가 보여준 강력한 회복 의지와 이에 따른 행동 실천을 목격하면서 심히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던 그날, 나는 엄마가 일평생 이렇게 스스로에게 굽히지 않고 도전하며 살아왔음을 짐작했다. 가슴이 시려왔다.

잡지 일을 하던 나는 30대, 40대, 50대 …… 70대의 인터뷰이를 만날 때마다 준비한 질문 외 질문을 했다. 40대는 도대체 무엇이고 도달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며 어떻게 맞이하고 살아가야 하는지가 궁금했었다. 50대에는 무엇이 올까? 그리고 그 다음은? 왜 미리 알려주는 책은 없을까, 자문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문을 했다. 어디에도 딱 꼬집어 주는 답은 없었다. 성공도 실패도 다 해본 후에,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준비했으면 했다. 

엄마의 일생 91년을 돌이켜 보면서 이제야 등잔 밑이 어두웠음을 깨달았다. 나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지척에 두고 먼 곳을 돌며 찾아 다녔다. 그런데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 자신은 없다. 형만한 아우 없고, 엄마만한 자식은 없나 보다. 백지 상태였던 운명을 이만큼 끌고 간 엄마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의 젊은 시절을 짚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냥 엄마니까, 어렵고 힘든 길도 가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내가 엄마보다 더 누워있고, 더 쉬었으며 많이 게을렀다면, 엄마는 화력을 장전하고 끊임없이 장도에 오르는 증기 기관차처럼 인생을 달려왔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한 사람이자 관찰자인 내 눈에 엄마는 일생을 지루하지 않은 리얼리티 소설로 완성해 간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그녀의 삶에 감탄을 발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2019년 1월 19일. L153 Art Company 갤러리 방문.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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