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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16. 2019

Her Story - 일자리 구하러 왔습니다

1950년 겨울에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온 나라가 전쟁 중이었지만 피난지인 부산에서는 포성이 안 들렸다. 전쟁 중인 나라 땅 같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대포 소리, 총소리, 비행기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사람마저 무서웠다. 그와 달리 한꺼번에 몰려든 타지 사람들로 이미 복잡했던 부산은 전쟁 전의 서울에서처럼 일상적인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우리 가족은 피난민이고 전쟁 상태였으므로 나는 대학 2학년생이지만 일거리를 우선 구해야 했다. 눈을 크게 뜨고 정보를 얻기 위해 ‘안테나’ 폭을 넓히고 주변을 세심히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방구 앞을 지나가는데 유리창에 ‘타이핑을 가르친다’고 써붙인 쪽지를 보았다. 타자를 잘 쳐야 취직이 된다고 들었던 터라 안으로 둘어갔다. 작은 널빤지 위에 타자기 한 대를 올려놓고 중학교 영어 교재 한 권을 주고는 혼자 치는 거라고 했다. 처음에 기계에 대한 기본 작동 원리를 설명해준 것이 가르침의 전부였다. ‘타자 교습’이라기보다는 ‘타자 연습실’ 대여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그때는 타자기를 만져보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이렇게나마 타자를 배우기로 했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전시 피난지에서 타자를 배우는 최상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방구에 매일 나가 홀로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두들기며 연습했다. 타자 실력을 좀 갖추고 나서 미국 회사가 있다는 초량동으로 나갔다.

초량동 큰 길가에 사무실을 차려두고 구인활동을 하고 있던 <55th Quartermaster (제55 병참 대대)>를 먼저 찾아갔다. '병참 대대'는 일자리를 구하러 찾아간 첫 사무실이다. 인사처를 찾아가서 “일자리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어와 우리말 인터뷰에 쉽게 통과되어 바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도 다녀야 했으니 정직원은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으로 사회에 첫발을 뗀 셈이었다. 마침 부산 내 어디에 무슨 회사가 있는지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QM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므로 출발부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첫 직장은 학교도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곧 냉동창고인 <콜드 스토리지 1(Cold Storage One)>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옮겼다. 조금 지나고 보니 대교동 집에서도 훨씬 가깝고 조건이 더 좋은 <콜드 스토리지 2>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일자리를 문의하러 가니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라고 배려를 해주었다. 학교까지 보내준다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어서 이곳으로 옮겼다. 사무실 안에는 이미 10여 명의 여직원들이 타이핑을 하며 일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서류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타자수가 많이 필요했다. 거기서 이화여자중학교 동창생도 만났다. 그 친구는 외국에서 살다 와서 영어도 나보다 훨씬 잘했다. 그때도 부모 따라서 해외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이 있었다. 받은 월급은 집에 다 갖다 주어 피난 살림에 보탬이 되게 했다. 전쟁 중이라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아르바이트 생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맞는 일자리 찾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침 영어가 필요한 시기에 영문과에 다니고 있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느덧 부산에 온 지 3년 차가 되었다. 부산의 임시 대학 캠퍼스에서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머릿속은 온통 아르바이트 말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궁리로 가득 찼다.


1950년 12월경 UN의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이 부산에 들어왔다. 파괴된 한국의 재건을 목표로 세워진 UN 산하 특별 임시 기구로 '운크라'라고 불렸다. 우리 가족이 부산에서 세 들어 살던 집은 부산 시청 근처 부두 가까운 집이었는데 2층에 방 두 개, 아래층에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었다. 집 앞에서 길 건너편을 보면 빌딩은 아니고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가 UNKRA 사무실이었다. 아침마다 그 건물을 바라보게 되는데 스마트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출입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훤칠하고 똑똑해 보였고 나이도 지긋하고 점잖은 것 같았다. 여직원들의 수보다 남자 직원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호기심이 일면서 점점 마음이 끌리고 ‘나도 저길 가야겠다. 저길 가야 돼!’하며 마음을 다졌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만큼 그곳에 입사하려면 영어와 타이핑 실력을 갖추어야겠지만 경쟁률이 상당히 높을 듯해서 지레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포기하느니 과감히 도전하기로 했다.

마침 이화대학 동창 친구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취직을 하고 싶으니 누구든 관계자를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회사에서 '미스 문'으로 불렸던 그 친구는 어떤 나이 많은 한국분을 소개해 주었는데 가톨릭 신자였고 UNKRA 한국인 근무자들 중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분의 소개로 원서를 내고 UNKRA 미국 대표와 인터뷰를 한 후 한국인 대표와 또 인터뷰를 했는데 합격했다. 정직원으로서 첫발을 내딛고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게만 생각했고 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회사에 합격하니 기분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산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이미 세 군데 직장을 거쳤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도 아르바이트생도 아닌 당당한 사회인으로 근무를 한 첫 직장에서 신입인 내가 처음 배치된 곳은 ‘문서수발부’였다.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이 부서 저 부서로 문서를 돌리는데 문화예술 부서장인 미시즈 에블린 맥큔(Mrs. Evelyn McCune)과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었다. 연희대학교 출신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베커(Becker)인데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녀가 보여준 사진에는  색동저고리에 치마 아래로 솜바지를 입고는 덕수궁 앞에서 찍은 일곱 살짜리 소녀가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당신의 비서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왜 아니겠는가. 부서장이 신참내기에게 제안을 하는데, 게다가 부서가 문화예술 부서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자리가 있겠나 싶어 흔쾌히 승낙했다. 신입사원이었지만 맥큔의 비서 일, 8군과의 전화 업무, 서류 작성, 문화 업무 등 다양한 일을 처리했다. 직원은 소수였고 해야 할 일이 적었던 적은 없다. 특히 타이프로 쳐야 하는 문서 작성 양은 넘쳐났다. 비록 전쟁 중이었으나 우리나라 문화를 미국에 알리는 업무를 담당했다. 전시 상황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문화를 논하고 누린다는 것은 호사이자 허영 이상일 수 있다. 미국 문화가 광복 후, 그리고 전시(戰時)에 물적 지원과 함께 알게 모르게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서 미시즈 맥큔은 우리나라 문화, 특히 관심을 두고 있던 신사임당을 역으로 미국에 알린다고 했다. 황당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신사임당을 알리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고 자부심을 갖고 이행했다. 

UNKRA는 부산 피난 시절부터 직원들이 생필품을 미국에 주문하여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을 주었다. 신기하고 진기한 물건이 가득 찬 두툼한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 신청하면 얼마 후 소포 꾸러미가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해외에서 받는 첫 소포들이었다. 나는 비록 전쟁 상황이었지만 당시에 미국에서 유행하는 옷이나 구두를 직접 구입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품목은 발등에 구두끈을 매는 투 톤 슈즈였다. 잠시 피해 있자며 떠난 피난이라 옷도 변변히 챙겨가지 못했는데 전쟁은 지리하게 이어졌고 계절은 거듭 바뀌었다. 예상하지 못한 회사의 이런 혜택으로 직장인의 깔끔한 차림새로 산뜻하게 활보하는 20대 초반을 보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불행 가운데 언제나 다행히 있어서 서글플 삶이 그나마 유쾌하게 이어졌다. 생각하기 나름인가 싶다. 

결국 졸업식을 부산에서 하게 되었다. 북새통 같은 3년을 견뎌냈다. 멋진 학교를 놓아두고 3년이나 임시 가건물 학교를 다녔다. 속상하고 또 속상했다. 무엇보다 서울 캠퍼스에서 대학 4년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참으로 크다. 영문과 교수의 꿈도 접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공부를 하게 되고 아르바이트도 하게 되어 살아가게 되었으니 또한 감사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다른 길로 들어섰지만 새 길을 따라 삶의 퍼즐 조각을 찾고 맞춰가며 완성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꿋꿋하게 새 길을 가야 한다.


사무실에서.
Cold Storage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대학 2학년 시절.
1951년 12월 30일, Lt. Sims에게서 받은 사진. Office에서의 하루. 
위 사진 뒷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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