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0세까지 엄마를 든든하게 떠받치던 다리에 이상이 생겼다. 일어났다 앉았다 할 때마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나이 든 만큼 오래도록 많이 사용하여 무릎이 아픈 것이니 그냥 버텨내야 하는 줄 알았다. 정형외과 병원장을 하는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나이를 보니 70대도 있지만 90대도 있었다. 저리 나이가 들었는데 수술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그의 답은 “70대가 늦은 나이 같지만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르는데 그 긴 세월 동안 이런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어. 몰라서 그렇지 이 고통이 무척 커.”라고 했다. 이 말에 나의 마음이 움직여 엄마 나이 80세에 양 무릎 수술을 감행하기로 했다. 나는 강남에 있던 회사 근처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수원에 있는 병원을 선택했다. 어느 병원으로 할 것인가는 환자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신뢰를 따라가는 것이 환자의 건강 회복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수원의 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고 뇌졸중과 치매를 앓게 된 아버지는 서울 집에 계셨으니 회사, 병원, 아버지 댁과 나의 집을 오가며 부모님의 보호자로서 총관리를 하게 되었다.
사전 검사를 모두 거친 후 수술을 몇 시간 앞둔 시각, 간호사가 보호자 사인을 하라며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보험 가입할 때나 모바일 폰 계약할 때 깨알 반 톨만 한 글자로 가득 쓰인 서류처럼 글자로 한가득 메워진 종이 서너 장을 손에 받아 들었다. 수술을 앞둔 모든 보호자가 거치는 절차이지만 거기에 적힌 문구를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목이 메고 눈알이 쓰려왔다. 예전 같으면 이런 건 아버지가 척척 해냈을 텐데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 보호자로 사인을 해야 하니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졌다. 정확한 문구가 지금 구절구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그 내용은 ‘환자가 사망하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류의 문구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사인을 했다.
엄마는 양쪽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였으므로 양 무릎을 모두 수술하기로 하였는데 환자가 힘들 것을 고려하여 의사 선생님은 한쪽 무릎 수술을 한 뒤 어느 정도 회복되면 다른 무릎을 수술하자고 제안했다. 용감한 나의 엄마는 수술의 고통을 두 번 겪느니 한 번에 수술받겠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수술실에서 일어날 일, 수술 후 환자가 겪게 될 상황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아프고 힘들다는 한 문장 정도에 의지하여 양 무릎을 동시에 수술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아무튼 엄마의 고집대로 진행하게 되었고 수술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마칠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수술실로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들어갔다. 근 10년 후 91세가 되었을 때 백내장 수술을 할 때도 엄마는 “할 수 있어”라고 짧고 굵게 한 마디 한 뒤, 내 손을 밀어내고는 혼자 걸어서 수술실로 향했던 용감무쌍한 할머니였다. 수술실로 들어간 사이 나는 음료수와 요구르트류, 과일을 맛과 종류별로 냉장고에 가득 사두었다. 마취에서 깨어나면 입맛도 밥맛도 없을 것이고 소화도 안 될 것이며 고통으로 인해 만사가 다 귀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로 간단히 마실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그 많은 것을 다 드시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수술 시작한 지 세 시간이 지나도 엄마는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입원실을 나눠 쓰는 스물아홉 살 난 환자는 인대 수술을 받았는데 엄마보다 늦게 들어가 훨씬 먼저 침대차를 타고 나타났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그녀가 울부짖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와 침대차 구르는 덜그럭 소리가 끝없이 장단을 맞추고 이어질 것 같았다. 이 누지근한 소리들이 갑자기 나를 두려움에 갇히게 했고 5초가 멀다 하고 시계만 쳐다보게 했다. 병실 문으로 뭔가가 슬며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호사인가 했더니 침대차가 아무 소리 없이 서서히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 위에서 엄마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의사는 무릎을 절개하니 예상 밖으로 마모가 극심하여 수술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나중에 보여준 사진 속 무릎뼈는 늙은 고사리 잎처럼 얼기설기하고 삭아서 조금 다듬는 정도로는 재사용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으며 그런 부분을 일직선으로 잘라내고 양 무릎 아래위에 스테인리스 무릎을 각 한 개씩 총 네 개 박아 넣었다고 했다. 수술 도중 의사가 나와서 이 방법에 대해 나와 상의한다고 해도 무지(無知)한 나는 무조건 동의한다고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집도하는 의사 선생님과 수술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을 내려달라고 기도를 할 뿐이었다.
엄마의 침대차는 피비린내를 앞세우며 들어왔다. 나는 그 진한 냄새에 순간 어지럽고 구토가 났다. 양 무릎 위에는 세로 길이로 약 15센티미터가량 꿰맨 자국이 있었다. 엄마는 당분간 걷지도 못하고 무릎을 굽힐 수도 없었으며 침대에 그대로 일어나 앉기도 어려운 상태였음은 물론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엄마와 나는 수술 후 고통 외에 이런 여러 가지 불편이 따라올지를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눈물이 속으로 한없이 흘렀지만 애써 웃었다. ‘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것이므로…’라고 되뇌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나를 위로하고 엄마를 위할 말은 없었다.
입원실로 온 지 두어 시간 후. 엄마는 미국 드라마 <6백만 불의 사나이>가, 아니 바이오 우먼 <소머즈>가 슬로 모션으로 괴력을 보여주듯 양 손으로 침대 난간을 잡고 앉으려 했다. 이 드라마의 슬로 모션에 삽입된 음향 효과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의 엄마가 어느 정도의 강도로 침대 난간을 붙잡았을지 감을 잡을 것이다. 나는 내 눈도 의심했고 오히려 난간이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엄마가 일어나 앉아서 말했다. “요구르트를 줘. 먹고 스스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말했다. 나는 반백 년 사는 동안 이런 ‘철의 여인’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객관적 시각으로 제 3자의 입장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의지로 저렇게 도전하며 넘어온 긴 세월 속 한 여인의 모습을 목도했다. 그 입원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여인의 놀라우리만치 강인하고 강력한 의지를 목격했다.
엄마의 코는 수술실에서부터 마비되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입원실 내에 가득한 피비린내 속에 잠겨 있었다. 엄마는 요구르트, 음료를 억지로라도 먹었다. 이후에도 엄마는 식사를 거르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겉으로 무릎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옆에서 보기에도 버티기 힘들 통증일 거 같은데 엄마의 정신은 당면한 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리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진격하는 것 같았다. 그 외의 생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때의 기억으로 지레 겁을 먹어 미래에 무릎 수술은 절대 하지 않고 도망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아이는 말하는 품새가 때로 할머니 닮아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가 이다음에 무릎 수술하자고 한다면 나는 엄마처럼 용감히 나서지 못할 것 같다.
의사가 회진 때 수술은 잘 되었으니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걷기 운동을 각각 몇 회씩 하라고 했다. 매일 이 운동을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굳어진 후에는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앉기 어렵다고 했다. 첫날 첫 회 운동을 시도할 때 다리는 굽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을 밀어 무릎을 최대치로 구부리는 데 도움을 주는 기구를 사용했다. 그 기구가 더 이상 밀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밀어야 했다. 기구를 잡고 있는 나의 양 팔이 후들거렸다. 휘적거리며 다리를 끌더라도 의사 선생님이 지시한 횟수만큼 정확하게 복도를 왕복하며 엄마는 이를 악다물고 걷고 또 걸었다. 나 같으면 엄살떨며 꾀부리고 덜 걸었을 것만 같다. 입원 기간은 스무날 이상 된 듯하다. 그때는 길고 두렵고 힘들기만 해서 시간이 왜 이리도 더디게만 흐르는지 원망했는데 지금 되짚어 보니 낙엽 한 잎 떨구어 대는 한 줄기 가을바람처럼 짧게 느껴진다.
수술했던 그 해, 엄마는 팔십 대였고 나는 사십 대였다. 벌써 십 년 전 일이다. 수술의 고통은 일순간이고 살아갈 날은 참으로 길다. 친구의 조언대로 남은 삶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는데 고통 속에 참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엄마는 퇴원하고 지금까지, 91세가 된 지금은 최소한도로 지팡이의 도움을 받지만, 드라마 속 소머즈처럼 무쇠 다리로 잘 걸어 다닌다.
나는 세상에 맞서 홀로 서서 두려웠을 때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한다. 그리 무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