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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19. 2019

Her Story - 낭만의 사회 초년병

열심히 30일 동안 일하고 기다리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기쁘고 설레는 하루는 단연코 월급을 받는 날이다. 아시아재단으로 옮기고 나서 월급봉투 두 통을 매달 손에 쥐었다. 월급을 현금으로 받았는데 봉투 하나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봉투가 두둑하게 양손에 잡히면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시아재단에서는 ‘종교 불(宗敎弗)'이라는 화폐로 월급을 주었다. 선교사 등 종교인들에게 지급되는 돈이었는데 한국은행에 가서 우리 돈으로 교환해서 사용했다. 미국 달러가 아니고 종교 불로 주는 이유를 물으니 유리한 환율로 직원들이 조금이라도 월급을 더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답을 들었다. 얼마 지나서 종교 불은 사라졌고 이후부터는 달러로 그리고 한화로 받았다. 일도 재미있고 월급도 받아서 기쁜 사회 초년병의 시대에 나는 신바람 나게 일했다. 결혼 전에는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관리하며 전 가족의 생활비에 보태 썼겠지 싶다.

UNKRA나 아시아재단에서의 일의 강도는 옅지 않았다. 야근은 없었지만 근무 시간 동안에는 철저히 업무에 몰입해서 일을 쳐내야 했다. 그러니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통, 종로통까지 나와서 먹는 1시간 동안의 점심식사는 더욱 짜릿했고 일종의 호사이기도 했다. 오후 근무 시작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돌아가느라 또 줄달음질쳤다. 보디콘(Bodycon) 원피스나 H 라인 스커트를 입고 힐 뒷굽이 내는 또각또각 소리를 들으며 인도를 걷는 즐거움이 있었다. 거리의 사진사들이 우리를 바라보았고 셔터를 눌렀다. 이런 순간은 ‘잠깐의 낭만’이었고 절대 길지 않은, 짧은 즐거움으로 오후 업무에 다시 몰두하며 일하는 맛에 취할 수 있었다.

5시 정시 퇴근이라 나름 저녁이 ‘아름다운’ 삶을 꾸려나갔다. 나들이하는 반경은 주로 사대문 안이었다. 나는 명동의 돌체 다방 단골손님으로 퇴근 후 이 다방에서 클래식 음악을 실컷 들었다. 이화여자중학교에 다니던 때 임원식 음악 선생님 덕에 클래식 음악에 귀가 익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데이트할 때도 <돌체>를 비롯해 <단성사>에 영화를 보러 가고 덕수궁에서 산책하고 <한일관>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데이트 코스를 따랐다. 직장생활로 인해 데이트할 시간이 생각보다 충분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만나면 1시까지 돌아가야 하니 맨날 시계를 들여다보며 뛰어 들어갔다. 직장인의 삶은 요새랑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학생 때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좀 더 커서는 직장을 구해서 성실히 회사 생활을 하고 월급을 탔고 생활을 해나갔다. 전쟁은 끝났고 안정되기를 바랐다. 소시민의 아주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늘 입던 한복도 몇 벌 있었지만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니 외모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양장 차림으로 회사에 다녔다. 지금처럼 기성복이 많던 시절도 아니니 명동에 있는 단골 양장점 몇 군데에 가끔 가서 나의 스타일대로 맞춰 입었다. 머리는 종로의 유명한 <세븐> 미용실에서 했다. 단골 미용실이었는데 결혼할 때도 거기에서 머리를 했다. 세븐 미용실이라고 하니 나와 엇비슷한 나이의 서울 출신 몇 사람이 그 이름을 반긴다. 다들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광화문, 종로, 명동은 서울의 중심이었고 멋과 유행은 이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생활 반경은 이 세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서울 장안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에는 진짜 멋쟁이들이 참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그리 멋쟁이는 아니고 서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고 당시에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당시 대다수 보통사람들보다는 다른 재미를 더 경험하며 산 것 같다. 나의 그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고 말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이 크게 놀랄까. 아무튼 내가 계속 살아온 환경이나 지금이나 조금 다를 뿐 내게는 비슷하게 보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살아가는 기본은 한끗 차이이다.

1954-55년 즈음. 직장생활 중 덕수궁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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