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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28. 2019

Her Story - 마흔, 다시 문을 두드리다


아이들을 정신없이 키우고 보니 어느덧 나이 마흔이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훗날 조금씩 펼쳐질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고 나는 그런 세상에서 일하고 싶었다. 나의 반경은 걸어서 한 바퀴에 끝나는 집과 마당과 골목길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만 평생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나는 나가서 일을 해야 해!' 이런 의지가 강했다. 재취업이 나의 목표였고 가고픈 회사들을 슬라이드 쇼처럼 머릿속에서 흘려봤다. 마흔에 다시 취업하려고 생각했으니 뭘 몰랐는지, 무모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재취업하려고 더 배우고 그러던데 그때는 딱히 그런 게 없었다. 그래도 취직하고픈 사람들은 언제나 많았고 취업문은 좁았다. 막둥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 다시 직장에 나가야지 했던 그 생각대로, 그 마음, 그 다짐대로 경력단절 9년 만에 새 직장에 도전하게 되었다. 아이 넷의 엄마였던 나이 마흔 살에…

재취업을 하려면 어디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가나 궁리했다. 그렇게 곰곰 생각하자 머릿속 영상은 한 회사에서 멈추었다. 아시아재단에 근무할 때 화가, 음악가, 교수, 출판사, 고고학자 할 것 없이 재단을 찾아왔고 당시 요청하러 온 사람들, 기관 중에 <걸스카우트 연맹>이 있었다. 연맹은 국제적으로 활동을 펼쳐나갈 자금을 만들어내기 어려우니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그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누구나 다 어려운 때, 문화예술계는 훨씬 더 힘겨웠다. 걸스카우트에는 청소년 교육을 위해 해외에서 원활히 활동할 수 있도록 경비를 지원했었다. 퇴사한 아시아재단보다 제일 먼저 걸스카우트 연맹이 떠올랐다. 걸스카우트는 국제단체이며 교육기관이기도 해서 근무 환경이 좋을 듯했다. 환경이 좋다는 말이 봉급을 많이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봉급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비영리 청소년 교육 단체라서 봉급에 대한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다만 교육기관이라 보람차게 일할 수 있고 내게도 선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거기에 지원해야겠다고 취업 1순위로 올려놓았다. 2순위는 없었다. 생각해두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지 9년이나 되었으니 이런저런 상황을 이야기하고 취업이 가능한지, 시류도 알아보려고 연맹의 양순담 총재를 찾아갔다. 품는다고 해서 소원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 했다. 찾아가는 것은 용기이다. 찾아가지도 않고 안 될 것이라고 마음먹는 것은 안 된 것이 아니라 자포자기이다. 

나는 걸스카우트 연맹의 문을 두드렸다. 걸스카우트는 이전 위치에서 안국동의 넓은 새 건물로 이사를 한 즈음이었다. 양순담 총재는 “걸스카우트 연맹에 지금 자리가 있다”라고 단번에 확답을 했다. 그래서 첫걸음에 덜커덕 취직되었다. 누구에게나 단번에 문이 이렇게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 의외로 쉽게 순조로이 풀렸다. 1순위에서 탈락하면 2순위를 찾아야 했는데 그럴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취직 운은 대학 2학년, 피난 간 부산에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할 때부터 따라왔다. 재취업을 위해 크게 준비해둔 것은 ‘열정적 다짐’과 그간 쌓아온 기초 학업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걸스카우트>는 9년간 경력단절 상태였던 40대, 네 아이 엄마의 재취업 회사로는 안성맞춤이었고 내게 온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평생 동안 취업 운이 따랐나 보다. 

나의 부모님이 살아 있다면 학교 입학도 취업도 재취업도 속 썩이지 않고 한 번에 되어 표현은 크게 안 해도 속으로 담담히 좋아했을 것이다. 부모님을 대신하여 남편이 기뻐하고 축하해주었다. 네 아이들을 키우며 잘 해낼까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도 했지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살림을 도와주고 아이들을 봐주는, 엄마 역할에 때로는 큰딸 몫까지 든든히 해주는 똘똘이 도우미가 있었다. 십 대 후반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 우리 식구와 다름없었다. 살림도 잘했고 요리 솜씨도 탁월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아이였다. 아침에 댓 개의 도시락을 싸야 했는데 20대였던 그 아이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커서 도시락 준비를 다 해놓고 새벽에 영어학원과 한자학원에 갔다. 날이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집안일을 하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상식을 얻던 참으로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내가 직장생활을 무리 없이 해나가고 아이들도 키웠던 것은 이 ‘큰딸’이 살림을 도맡아준 덕분이었다. 얼마 전에 편지 봉투에 적힌 옛 주소로 편지를 보냈는데 이사를 갔는지 반송되었다.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1969년. 안국동 걸스카우트 건물 옥상에서 직원들과 함께. 나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69년, 걸스카우트에 재취업했던 해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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