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르 Dec 08. 2022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들


이번 주는 내게 '나의 쓸모'를 되짚어보게 한 시간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갑자기 면접을 볼 기회를 얻었고,

그 준비를 하느라 동분서주하며 바빴다.






면접은 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또 그에 따른 많은 것을 남긴다.


준비 과정에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에 내가 적합함을 보여 주기 위해

내가 가진 많은 면 중 적당한 것, 보여줄 것, 숨길 것을 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는 반면 내가 준비해 간 내용의 어떤 점이 부족했던 것일까

나의 쓸모를 그들은 왜 알아봐주지 못했나를 되짚게 된다.


그 과정은 마치 바쁜 아침 온 집안을 뒤져 이 옷 저 옷 입어보고 나갔다가

허물처럼 던져둔 옷들이 쌓인 공간으로 돌아와 마주하는 

그 허탈함, 짜증, 귀찮음 등등의 합체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대체 '나의 쓸모'란 무엇일까.


내가 뭘 해야 쓸모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내 쓸모를 결정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





면접을 준비하면서는 경험을 근거로 내세웠다.

경험안에는 그간 공부하며 쌓아둔 성적, 대내외활동, 자격증, 어학점수, 유학 이력, 

뭐 그런 것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력이 포함되겠지.



물론 경험은 중요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거쳐 행동해왔는지

바로 눈으로 보이게 증명이 되니까.



하지만 경험의 나열만을 보고 어떤 한 사람의 미래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꿈꾸는 비전과 바라는 모습, 계획 같은 건 그 '쓸모'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타인을 마주할 때 그 상대방의 '쓸모'를 무얼 보고 판단해야 할까?

경험은 과거라면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모습이 현재,

앞으로 나와 계속 함께 할거라 약속하는 그 시간은 미래.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 원더 포스터



내가 인생영화로 꼽는 <원더(Wonder)>에 보면

주인공 '어기'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런 격언을 알려준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번역가가 아니니 훌륭한 번역을 내놓을 순 없지만

그래도 영문학을 전공한 짧은 가방끈을 이용해 나름의 해석을 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격언으로 보았다.


타인을 내가 바라봐야 할 때, 판단해야 할 때

사회가 요구하는 잣대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 보다는

Kind하게 대해라. 




뭐 착하게 대해라 정도로 쉽게 풀 수도 있지만

Kind라는 간단한 영단어에도 

친절한, 관용적인, 다정한, 정중한 등 뜻이 아주 다양하게 존재한다.



인간적인 면을 잘 살펴라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어떤 잣대에 비춰 맞다 틀리다 따지지 말고 포용적으로 바라봐라 뭐 그런 뜻?!

어쨌든 나는 내 마음에 와닿는 의미로 저 영어문장을 통째로 외우고 있다.

나름의 가치관인 셈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한 사람의 쓸모는 경우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누구에게는 필수적인 사람, 누구에게는 필요없는 사람.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이번에 내가 본 면접에서 나는 그들의 수단이 되기에 적절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나에게도 그 곳이 쓸모있었나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해볼 기회를 주어야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그곳이 나를 거절했다고 해서 '나의 쓸모'를 의심했나.

내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다.

나도 똑같이 평가자의 입장에서 그 곳의 쓸모를 따져볼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너한테도 그럴 권리가 있어.' '너의 쓸모를 의심하지 마.'







돈을 번다는 건 결국 타인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풍요를 제공받는 물물교환 행위이기에,

내가 누군가로부터 따박따박 월급을 받고 싶은 거라면

어떤 기업의, 어떤 곳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걸맞음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 사실이 참 씁쓸하지만, 

그래서 이런 고민이 깊어질 때면 나의 쓸모 자체에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믿어야 하겠지. 나 자신의 가치를.



동시에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더 강하게 든다.

나의 쓸모를 알아봐줄, 나라는 퍼즐 조각을 강하게 원하고 있는 퍼즐 판으로

눈을 돌리면 해결될 일이다.


나를 깎고 깎고 깎아서 어울리는 퍼즐 조각이 되려고 했지만 그래도 아니라하면,


판을 갈면 된다. 

새로운 판에서 또다른 쓸모를 부여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그래, 그렇게 흘러가는 거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